188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하여, 한성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반일 연설로 체포되었다가 도중에 탈출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초 진주(晋州)에서 김재화(金在華)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다. 독립선언문과 교유문(敎喩文)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해 시민들에게 사전에 배포한 후 3월 18일 진주 장날을 기해 시장에 운집한 군중을 규합해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되었다.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복역 후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도 1921년 7월 진주청년회에서 강연을 하며 청년운동을 했다. 졸업 후 귀국해 1923년 9월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피해 받은 재일본진재동포구제회 발기회의 간사장을 맡았다. 경상남도 도청이전방지운동을 벌여 1925년 1월 조선인 대표로 선출되었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진주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3년간 재직했으며, 이후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대저보통학교, 1935년부터 주촌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진주시립근로학원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경상남도 진주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6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에 위촉되었고, 같은 달 국회 상임위원회 내무치안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국 군사고문단 설치를 환영하는 성명에 동참했으며, 10월 27일 일어난 빨치산 진주군청 습격사건 국회조사위원으로 위촉되어 본회의에 조사내용을 보고했다. 1949년 12월 일민구락부(一民俱樂部), 신정회, 대한노농당(大韓勞農黨), 무소속 4파 합동과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발족에 무소속의원으로 참여했다.
1950년 1월 책임내각제로의 헌법개정안을 발의하고 주도적으로 개헌을 추진했다. 같은 해 3월 탄핵 예비재판관으로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