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호는 경호(鏡湖)이고, 아호는 현주(玄州)이다. 다른 이름으로 허윤(許允)을 사용하였다. 덕광윤德光允), 덕광익(德光翼)이라고 창씨개명하였다.
1900년 12월 21일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인 1915년 3월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범어사가 운영하는 중등학교 지방학림에 입학하였다. 3학년에 재학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범어사와 동래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동래장터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위반’ 혐의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21년∼1922년간 동양대학 문화학과에서 수학하였다. 귀국 후 강연활동을 하면서 지역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1월 7일 불교유학생학우회 주최 강연회에서 「문학상에 나타난 2대 분쟁」이라는 연제로 연설을 행하였고, 같은 해 8월 동래면 기독청년면려회 주최 강연회에서는 「평등에 대한 일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25년 11월 동래청년연맹 창립준비위원과 창립위원으로 활동하고 동 연맹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6년 8월에는 동래청년회 서무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 동래면 시구개정 변경 반대문제로 면민대회가 열리자 청년회 임원자격으로 반대운동의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8월 동래지역의 유일한 문예잡지사인 평범사를 창립하고 월간 문예잡지 『평범』을 발간하였다. 또한 잡지 『신민』의 이사를 맡으면서 다수의 문학, 논설문을 게재하였다. 소설로 「방황」(『신민』 7호, 1925.11), 「그와 그들」(『신민』 24호, 1927. 4) 등을 발표하였고, 논설 「자유인과 노예」(『신민』 8호, 1925. 12), 「농민운동」(『신민』 13호, 1926. 5), 「조선의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신민』 15호, 1926. 7), 「소유의 진화」(『신민』 56호, 1930. 2) 등을 게재하였다.
1928년 2월 26일 동래청년회가 해체되고 동래청년동맹이 창립되자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동년 4월 신간회 동래지회 전형위원과 본부 대표위원·정치문화부 총 간사를 맡았으며, 언론출판결사자유 금지문제, 의무교육 문제, 공창제 폐지 문제, 재만동포 생존권 문제 해결 방안 등을 적극 제기하였다.
1928년 5월 29일 조선청년총동맹 경남도연맹에서 대회 집행부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청년동맹 활동 중 회원연령을 25세로 제한하도록 전국대회에 건의하였고 파벌주의 박멸 등을 결의하였다. 이 시기에 대중강연과 사회단체에서 중책을 맡으며 부산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신간회 핵심 인물들을 검거하고 동래지역 사회운동 역량을 위축시키면서 지역운동이 침체상태를 맞게 되자 1930년 두 번째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동경 소재 다이쇼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불교학을 연구하면서 사회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김법린이 중심이 된 항일 비밀결사 ‘만당(卍堂)에서 활동하고 조선유학생 동창회 회장을 맡았으며, 재일본 조선청년회 서무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유학생학우회의 확대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순회강연을 통하여 사회문제에 관한 발언을 적극 개진하였다.
1932년 3월 다이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이후에는 불교학 연구와 불교단체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다이쇼대학 재학 중 불교학 관련 근대 학문을 습득한 것은 조선 불교계의 현안에 대한 문제와 불교 근대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모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조선불교중앙교무원 대표이사를 역임하였으며, 1932년 9월부터 1933년 5월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겸 학감을 지냈다.
1934년 7월 경상남도 김해의 해은사 주지 취임 인가를 받아 1937년 7월 임기만료 때까지 주지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2년 이후 불기개선심의회 상무위원, 조선불교교정연구회 연구부장, 총본산 건설기초의원 등을 지냈다.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등 적극 친일행위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2월 31일 본산지주회의에서 총본산 기초위원에 선출되었고, 1937년 3월부터 1939년 1월까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기관지 역할을 한 『불교신』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이 잡지에서 「지나사변과 불교도」 등의 권두언을 통하여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신앙보국, 징병제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여러 편의 친일 기고문을 통하여 일제 침략전쟁에 조선불교가 적극 협력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을 확립하고 대동아 신질서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불교로써 대승불교에 입각한 일본불교를 설정하고 그 논리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1937년 5월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 해동역경원 주임역경사로 활동하였고, 1938년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경성연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38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중앙교무원평의원, 이사, 상무이사, 재무이사, 조계학원이사를 역임하고, 1941년 5월 전쟁협력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불교 조계종 종정 사서로 활동하면서 권두언, 기고문, 시국순회 강연을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1941년 8월 종교, 사상, 정신문화 단체대표자와 함께 ‘조국 일본을 수호하자’라는 구호아래 ‘애국을 위한 모임’ 이라는 시국간담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1942년 9월 조선불교협회가 주최한 내선승려 합동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해 ‘대동아전쟁과 일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시국 순회강연을 벌였고, 1943년 11월 조선의 종교단체 대표자들이 주최한 육군 특별지원병 실시 사기양양 대강연회에 참석하여 조선불교 대표 자격으로 시국 강연을 하였다.
해방 후 1945년 9월 혜화전문학교를 복구해 교장에 취임하고, 건국준비위원회 개최를 위한 모임에 참가하면서 사회활동을 재개하였다. 1946년 1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혜화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해 동국대학으로 개명되자 1948년 11월까지 초대 학장을 맡았다. 또한 1946년 3월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자주독립을 촉성하는 전조선문필가대회에 추천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49년 1월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경상남도 부산 갑구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고등고시위원에 위촉되었다. 1950년 6월 실시된 부산시 갑구 국회의원에 낙선한 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비문에는 1952년 1월 3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