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현손(玄孫) 정규영(丁奎英, 1872~1927)이 정약용 사후 85년이 지난 1921년에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정약용의 일대기이다. 사암(俟菴)은 다산의 호이다.
정약용의 연보로는 61세(1822년) 때 직접 작성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있고, 76세로 사망하기까지의 연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85년이 지난 1921년에 현손인 정규영이 “그 편질(篇帙)이 방대하여 흩어지고 없어진다면 후손 중에서 누가 기억할 수 있을지 두렵다.”는 마음을 품고 그의 가계와 행적을 연월(年月) 순으로 기록하고, 대표적인 저술의 주제와 서문을 가려서연보를 편찬하였다.
2책. 필사본. 책 크기는 세로 27.3㎝, 가로 19.5㎝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21년 연보를 작성하기 시작하여 1922년 완성했다는 정규영의 발문이 있다.
“영조대왕 38년 임오년 6월 16일 사시(巳時)에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의 옛집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어릴 때 이름은 귀농(歸農)이었다.”라는 글로 시작하여 “헌종 2년 병신년 2월 22일 75세 진시(辰時)에 병환으로 열상(洌上)의 안방에서 세상을 마쳤다.”는 글로 일대기를 정리하였다. 마지막은 “융희 4년 경술년 7월 18일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고,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는 글로 끝맺었다. 연보 뒤에는 정규영의 발문이 실려 있다.
주요 내용은 정약용의 출생부터 서거 때까지 그의 가계와 행적이 연대순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저술의 서문이 거의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의 정치적 상황, 정약용의 수학시절과 관직시절, 유배기 그리고 해배 이후의 그의 일상과 교유관계, 인간적인 면모, 저술활동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자찬묘지명」은 정약용이 환갑 때 직접 작성한 것이어서 그 후의 행적은 정리된 것이 없었는데, 그의 사후 85년 만에 정규영이 정약용의 유년부터 서거 때까지의 행적을 연대순으로 자세히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저술의 서문이 거의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교유관계를 많이 수록하고 있어서 정약용의 일대기를 파악하는 데 가장 충실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