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8년(정조 12)에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전국의 각 군현에 관문을 내려 보내는 것으로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에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신진기예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김종수·서호수·이가환·이서구 이외에도 윤행임·이만수·성대중·박규순·이지영·정현조·이면응·정동관 등이 팔도를 나누어 맡았다. 유득공·이덕무·박제가 등 규장각의 검서관들도 참여했다. 지방 군현의 읍지를 기다리던 정조는 얼마 뒤 비변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읍지를 활용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1790년(정조 14) 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서장서록(西序臧書錄)』에는 이 책의 별칭인 『해동읍지(海東邑誌)』46책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796년(정조 20) 경에는 60권 정도의 편찬이 일단 마무리되었다. 고종 때 완성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이 책이 「여지지(輿地志)」항에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해동여지통재』는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전국에서 모은 읍지와 비변사에 있는 각종 읍지 자료를 기초로 편찬한 전국 지리지다. 정조는 수록 순서를 서울과 배도(陪都), 도별 군현 순으로 정함으로써 도시와 군현 간의 위계를 분명하게 설정했다. 호구, 전부, 관액 같은 실용적 항목 이외에도 형승(形勝), 제영(題詠)과 같은 전통적인 항목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보여주었던 성리학적 교화의 측면과 『여지도서(輿地圖書)』가 구현했던 실용적 측면을 아울러 담으려 했던 것이다.
정조가 특히 강조했던 항목 중에는 호구(戶口)와 방리(方里)다. 정조는 각 군현의 방리 항목에서 면의 이름과 면내의 리(里) 간 거리를 기재하게 하는 한편, 서울은 방명(坊名)과 동명(洞名) 뿐 아니라 원동(元洞)과 소동(小洞)의 이름까지도 꼬리표를 달아 올리게 했다. 『해동여지통재』 편찬 과정에서 정리된 호구에 관한 자료는 ‘『호구총수(戶口總數)』’라는 이름으로 현재 전하고 있다.
정조는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던 『여지도서』나, 전국 지리지라고 말할 수 없는 『동국문헌비고』를 넘어서고자 했다. 이 책자는 정조가 가진 전국 지리지에 대한 정서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