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에 채색된 10폭 병풍지도로 전체 크기는 세로 139.0㎝, 가로 635㎝이다. 본래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규장각으로 옮겨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같은 이름의 지도가 소장되어 있으나 3폭이 없어진 상태이다. 이밖에도 지도책의 일부로 남아 있는 소형 지도가 있으나 그 내용이 간략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부분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이명이 『주승필람(籌勝必覽)』, 「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 『성경지(盛京志)』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제작한 지도이다. 중국의 군사관련 정보 및 만주 일대, 조선의 서북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당시 이 지역에 대한 조선의 인식 수준을 잘 보여준다.
효종의 북벌계획 좌절 이후 숙종의 국토방위 시책에 의하여 이이명이 당시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제작한 것이다. 사신으로 북경을 다녀온 이이명(李頤命)은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등 두 종류의 지도 자료를 입수하였다. 숙종은 『주승필람』에 실려 있는 중국지도와 급하게 베껴온 「산동해방지도」를 하나로 합쳐 다시 그려 올리도록 명했다. 이때 이이명은 원본지도에서 소략하게 다루어지거나 그려지지 않았던 만주 지역이나 조선의 서북 지역까지 함께 그려 새로운 병풍지도를 제작했다. 서문에 따르면, 이이명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선극(仙克)의 『주승필람지서(籌勝必覽之書)』를 얻어 그에 『성경지(盛京志)』에 기재되어 있는 「오라지방도(烏喇地方圖)」, 그리고 우리나라의 「항해공로도(航海貢路圖)」 와 「서북강해변계(西北江海邊界)」를 합하여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관북지방 · 관서지방만 그렸고 대부분이 중국 지도인데, 동쪽 흑룡강(黑龍江)으로부터 서쪽 산하이관(山海關)을 지나 남당아안(南塘雅安)에 이르며, 그 사이의 성책과 만리장성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밖에도 요동반도와 요하의 하천과 산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육로는 통과 지점만을 표시해두고 있는 데 비하여 우리나라에서 산둥반도와 산하이관에 이르는 해로는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이밖에도 요새지의 수비 상태를 지도 안에 특별히 기록해 두고 있으며, 성의 망루에는 적색기가 날리고 진(鎭) · 관(關) · 보(堡) 등 요새는 적색으로 표시하고 있다.그런데 이 지도상에 표시된 중국 각 지역의 군사시설들은 명나라 말기의 것이었다. 만주 일대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성경지』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백두산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토문강’이라고 적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아야고강(阿也苦江)’이라고 적혀 있는데, 훗날 중국에서 이를 ‘토문강’으로 해석하였다. 실제 이 지도에 실려 있는 백두산과 토문강에 대한 인식 역시 『성경지』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에 있다고 생각되어 오던 선춘령(先春嶺)은 이 지도에서 온성부(穩城府) 건너편에서 멀지 않은 곳에 표시되어 있다. 선춘령 바로 아래로는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해란하(海蘭河)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선 초기 유형의 지도들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南流) 사실은 이 지도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로서, 윤관(尹瓘)이 세운 선춘령(先春嶺)의 고려경(高麗境)이라는 석비(石碑)를 고증할 수 있는 귀중한 지도이기도 하다.
「요계관방지도」는 작자와 제작 시기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지도로, 조선 후기 관방지도의 백미로 손꼽히는 지도이며, 회화적으로도 우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