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규(趙德奎)는 1728년 발생한 무신란(戊申亂) 때 반란군 측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주로 동조하는 세력을 규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덕규의 본관은 순창(淳昌)이다. 증조부는 참판을 지낸 조수익(趙壽益)으로, 류성룡(柳成龍)의 외손이다. 아버지는 조우형(趙宇衡)이고, 어머니는 이원례(李元禮)의 딸이다. 경기도 여주에서 거주하였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해에 그는 상주에 가서 상황을 탐문하기도 하였다. 무신란 때는 반란군에 참여할 세력을 모았는데, 조덕규는 반란군이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고 남태징(南泰徵)과 이사성(李思晟) 등이 반란에 가담한다는 사실을 한세홍(韓世弘)으로 전해 듣고는 반란에 참여할 세력을 모으는데 주력하였다.
조덕규는 4촌 형제인 조동규(趙東奎), 조명규(趙命奎) 등과 재종질인 조상(趙鏛)을 비롯해 신윤조(辛胤祖) 등을 반란군에 참여하도록 끌어들였다. 신윤조에게는 횃불을 밝히기 위해 송명거(松明炬, 관솔횃대) 2백 자루를 만들어 주면 후에 큰 공신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거나, 군사를 동원하고 술을 마련해 반란군을 호궤(犒饋)하도록 유도하였다. 또한 경기도 지평(砥平)에서 군사를 모으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덕규는 반란군이 서울에 진입할 때 참여하기로 하였는데, 신윤조가 동대문에서 들어오고 이사성이 서로에서 들어오고 남태징이 성안에서 일어나 화공(火攻)을 할 때 조덕규는 가노와 비부 중에서 건장하고 용맹한 자 수십 인을 모으고 조명규가 말을 장만하여 3월 15일에 일제히 모이기로 하였다. 물론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반란군을 모으는 과정에서 같은 가문 내에서 이견이 있기도 하여, 4촌 형제인 조관규(趙觀奎)의 경우 멸족을 우려하여 조덕규와 조상의 행동을 꾸짖기도 하였고, 조일규(趙一奎)의 경우는 반란 사실을 관가에 고하겠다고 했다가 조덕규에게 목침으로 얻어맞기도 하였다. 조덕규는 이후 죽산에서 반란군이 관군에게 패배하자 변복하고 이호(梨湖)를 건너 강릉에까지 숨어들었다가 추포 군관(追捕軍官)에 의해서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