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후기 이인좌의 반란에 가담한 모반인.
개설
생애
고령 신씨를 비롯해 교하 노씨(交河盧氏), 진주 유씨(晉州柳氏) 등 청주 지역의 남인들은 1695년(숙종 21) 청주의 대표적인 노론계 서원인 신항서원(辛港書院)에 신식을 제향하여 노론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사되지 않자 남인들은 별도로 쌍천서원(雙泉書院)을 세워 독향(獨享)하였다.
신천영의 할아버지는 문과 급제 후 장령과 사직(司直) 등을 지낸 신경제(申慶濟)로, 신경제는 1722년(경종 2)에 송시열(宋時烈)의 관작을 추탈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신은(申垽)이다.
활동사항
반란군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이탈하는 무리들이 생겼으며, 이들 중 일부는 스스로 공을 세워 속죄(贖罪)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신천영은 상당산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탈한 무리 중 일부가 상당산성을 지키는 군졸을 꾀어 문을 열도록 하고는 성내로 들어가 신천영을 비롯해 이인좌의 동생인 이기좌(李麒佐)와 하홍점(河鴻漸) 등을 체포하였다. 신천영을 체포한 무리들은 이 사실을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에게 고하였고, 박민웅의 판단에 따라 신천영 등은 모두 복주되었다. 박민웅이 복주된 신천영과 이기좌의 수급을 호서좌도 소모사(湖西左道召募使) 유숭(兪崇)에게 전달하여 서울로 보내졌다.
무신란 진압 이후 신천영과의 연좌률로 인해 처 강차(姜次), 딸 지애(至愛) 및 아들 선이(善伊)와 관이(官伊) 등은 함경도 경원부에 유배되어 노비가 되었다. 신천영 가계에 대한 연좌는 이후에도 진행되어 1731년(영조 7) 도망갔던 동생 신열증(申悅曾)이 청주 토포영에 체포된 후 경상도 웅천현에 유배되어 역시 종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 『남보(南譜)』
- 「청주 지역 영조 무신란의 동향」(고수연, 『조선시대사학보』42, 조선시대사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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