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사(冬至使) 조형이 1660년(현종 1) 10월,연경(燕京)에 파견될 때부터 다음 해 국내로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공식적인 업무와 일정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조형(趙珩,1606~1679)의 자는 군헌(君獻), 호는 취병(翠屛)이고,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1626년(인조 4) 별시 문과에 급제했으나, 고관(考官) 자제들이 함께 급제했다는 이유로 파방(罷榜)되었다가 1630년(인조 8)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사관(史官)을 거쳐 부교리, 헌납,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651년(효종 2)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차출되어 연경에 다녀왔고, 1655년(효종 6)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660년(현종 1)에는 동지사로 파견되어 다음 해 3월에 복명(復命)하였고, 1663년(현종 4) 다시 동지사로 파견된 바 있다. 이후 예조판서와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취병공연행일기(翠屛公燕行日記)』는 1660년 동지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사행 일기이다. 조형은 또한 통신사로 파견되었을 때에도 『부상일기(扶桑日記)』라는 사행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필사본인 이 책은 2001년에 간행된 『연행록전집』(20)에 수록되었다.
일기는 일자를 먼저 기록한 뒤에 이어 날씨와 수행 인원, 혹은 만난 인원과 노정 등 순서로 기록되었다. 1660년(현종 1) 10월 24일 국왕에게 인사를 올린 뒤 모화관(慕華館)을 거쳐 홍제원(弘濟院)에서 정재륜(鄭載崙), 이일상(李一相) 등과 인사를 나누는 것에서 시작한다. 11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11월 22일에 책문(柵門)에 도착하였고, 12월 12일에 산해관(山海關)에서 머물렀다.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여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고, 12월 28일 방물 세폐를 예부에, 미(米)를 호부에 제출하였으며, 12월 29일에는 황제가 보낸 관대(冠帶)를 받았다.
1661년(현종 2) 1월 1일 황제에게 진하하기 위해 궁궐에 나아갔으나, 황제의 상사(喪事)로 진하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1월 7일 역관을 통해 예부에 자문(咨文)을 전하였고, 1월 8일에는 역관으로부터 황제의 부음(訃音)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병의 유무는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황제가 임종 직전에 둘째 아들을 계승권자로 지명하였고, 내대신(內大臣) 4명에게 보정(輔政)하게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1월 9일에는 역관으로부터 새로운 황제의 등극을 진하하는 예가 있을 것이므로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참석하였고, 1월 11일에는 전 황제에 대한 곡반(哭班)에 참석하였다. 이후 몇 차례 더 곡반에 참석한 뒤, 1월 20일에 귀국길에 올랐다. 2월 15일에 의주에 도착하였고,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 곽산(郭山)에 도착하였다는 기사까지를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중후소우음(中後所偶吟)」, 「산해관작(山海關作)」, 「도영평부부사서상장유이제묘지행서이시지(到永平府副使書狀將有夷齊廟之行書以示之)」 등 9편의 시를 수록하였다.
이 일기는 동지사로 파견되었던 사행의 노정과 청나라의 동정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연행록이 개인적인 감회나 주변 경관 사물에 대한 감상 등을 기록한 것과는 달리 공식적인 일정과 노정 등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