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4년 당폐(黨弊)의 원인을 산림(山林)과 도학(道學)에서 찾고 이를 왕세손 등 후대 왕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간행한 어제서이다. 당폐를 극복하고 탕평을 이루고자 하는 영조의 정치의식을 보여주는 책으로, 간행 이후 정치 세력들에게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764년(영조 40) 5월, 황극(皇極)의 의리에 힘썼다며 박세채(朴世采)의 문묘(文廟) 종사(從祀)가 결정되었다. 영조가 추진하던 탕평(蕩平)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점이 높이 평가된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조치에 대해 반대 여론이 심해지는 가운데 같은 해 10월, 박세채의 외손으로 산림(山林)인 신경(申暻)이 상소를 올렸다. 신경은 상소에서 박세채를 문묘에 종사하면서 영조가 제시했던 이유에 유감을 표시함과 동시에 몇 명의 재상들이 겉으로는 박세채를 끌어들이면서 안으로 사당(私黨)을 만드는 등 국왕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11월 27일에 이은(李溵)이 상소를 올려 신경의 상소 내용에 대해 변론하면서 조부 이집(李㙫)을 비난했다고 공격하였다. 신경은 같은 해 다시 상소하여 전일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탕평파를 “염래지당(廉來之黨)”이라고 비난하였다. “염래지당”은 폭군으로 꼽히는 중국 주나라 주왕(紂王)의 신하인 비염(飛廉)과 악래(惡來)를 중심으로 한 무리를 지칭한다.
신경의 상소를 접한 영조는 그 상소를 몸소 불태우는 한편, 그를 기장(機張)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11월 30일 전교에서는 신경의 상소에서 조화시켜 보려는 신하를 배척하여 산림의 선비가 하나의 당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만약 근원을 통렬하게 깨뜨리지 않으면 그 폐해가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다고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이어 해당 전교를 하나의 책자로 만들도록 하고는 이름을 『엄제방유곤록(嚴堤防裕昆錄)』이라 명명하였다. '엄제방'이란 엄하게 방비하라는 의미며, '유곤'이란『서경』에서 따온 말로 의리와 예의로서 후세에 덕행을 남긴다는 의미다. 목판본으로, 1책(15장)이다.
서두에서 영조는 지난 40년간 재위하는 동안, 조종(祖宗)을 계술(繼述) 하거나 백성에게 혜택을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앞서 『감란록(戡亂錄)』, 『천의소감(闡義昭監)』,『엄변록(嚴辨錄)』등의 편수를 통해 자신의 뜻을 유시(諭示) 했음에도 “지금 다시 흥망의 기회가 되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 중국에서 붕당의 문제점을 거론한 뒤 조선에서의 당폐(黨弊)를 거론하였는데, 이로 인해 인재의 진용이 명문가의 자제에 국한되고 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나아가 당폐는 산림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며 신경과 함께 역시 산림인 송명흠(宋明欽) 등을 대대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칭 도학이 이처럼 나라를 망하게 만들려고 한다”며 이를 엄하게 제방하지 않으면 자신이 고심하는 탕평을 수립할 수 없고 후사에게도 가르침을 전할 수 없을 것이라며 글을 맺고 있다.
당폐의 원인을 산림과 도학으로 지적한 부분은 이후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767년(영조 43) 3월 전찬선 윤봉구(尹鳳九)를 비롯해 승지 이휘지(李徽之), 같은 해 6월 정언 임관주(任觀周), 1768년(영조 44) 5월 정언 이겸빈(李謙彬)의 상소, 1770년(영조 46) 3월 청주 유생 한유(韓鍮) 등의 상소 뿐 아니라 1769년(영조 45)에는 5월에는 노론계 영남 유생들의 연명 상소가 제출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는 강경하게 대처하였을 뿐 아니라, 당쟁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번번이 본서를 인용하며 이에 대처하였다. 이 책은 탕폐를 극복하고 탕평을 추진하기 위한 영조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어제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