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환(李森煥)의 자는 자목(子木), 호는 목재(木齋) 또는 소미(少眉)이고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아버지는 이광휴(李廣休)이고, 어머니는 해주정씨 정덕녕(鄭德寧)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 권영(權潁)의 딸이다. 종조부가 성호(星湖) 이익(李瀷)이고, 후일 이병휴(李秉休)에게 출계하였다.
1729년(영조 5) 경기도 안산의 첨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안산에 거주하면서 종조부인 이익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후손 이시홍(李是鉷)이 찬술한 행장에 따르면, 소과(少科)에 한두 차례 정도 응시한 듯하다. 1763년(영조 39) 이병휴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거주지를 충청도 덕산으로 옮겨 생활하였다. 덕산에서 이삼환은 성호 학통의 유지에 주력하는 한편 의약도 연구하여 1775년(영조 51) 홍역이 크게 유행하였을 때 청나라에서 간행된 『마과휘편(痲科彙編)』을 구해 스스로 연구하여 치료 요령을 체득, 가족과 인근 사람들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1813년(순조 13)에 사망하였다.
이삼환은 어려서 이익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양부를 따라 충청도 덕산으로 이주한 뒤에는 양부 이병휴가 주도한 성호 문집의 간행을 도왔다. 이병휴 사후인 1780년대 이후에는 사실상 성호학파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1786년(정조 10) 「양학변(洋學辨)」이라는 저술을 내놓았다. 「양학변」은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논설로, 당시 성호학파 일부와 자신이 거주하는 덕산 지역에 천주교가 확산되자 이를 경계하면서 현실에서 있을지도 모를 조정의 박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삼환은 또한 후학의 양성을 통해 성호학통을 이어가려 하였고, 1795년(정조 19) 충청도 온양의 서암(西巖) 봉곡사(鳳谷寺)에서 금정찰방으로 부임해온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강학 모임을 개최하였으며, 1799년(정조 23)에는 이익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影堂) 건립을 시도하였다.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현재 경기도 안산시 성호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초상화에는 본인이 쓴 자찬(自贊)과 이기양(李基讓), 이가환(李家煥)의 화상찬(畵像讚)이 기록되었다. 사후에 충청도 덕산 장천리에 안장되었다. 아들 이시홍이 행장을 찬술하였다. 저술로는 문집인 『소미산방장(少眉山房藏)』을 비롯해 『소미산방급고경(少眉山房汲古經)』, 『목재영언(木齋詅言)』, 『금삼품(金三品)』, 『백가의(百家衣)』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