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 ()

길주 북관대첩비
길주 북관대첩비
조선시대사
사건
1592년(선조 25)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정문부의 조선군에 의해 수행된 함경도 북부인 북관(北關) 지역 수복 전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북관대첩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가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가 점령한 함경도 북부지역을 수복한 전투이다.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이 회령에 오자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가토에게 투항하고 조선의 왕자를 넘겨주었고 일본군은 이들에게 명천 이북의 8곳을 맡겼다. 당시 경성에 있던 정문부는 군사를 모아 회령에서 국경인 등 반란세력을 처단하고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다. 이 전투는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전투 승리와 함께 임진왜란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정의
1592년(선조 25)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정문부의 조선군에 의해 수행된 함경도 북부인 북관(北關) 지역 수복 전투.
개설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는 군사를 정비하여 경성(鏡城), 장평, 임명(臨溟), 백탑교(白塔郊)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關北)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5월 초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곧바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일본군은 6월 함경도로 진입하여 안변(安邊)에 본진을 두고 계속 북상하면서 7월 중순에는 성진(城津)에서 북병사 한극성(韓克誠)의 조선군을 격파하였다.

한편 회령의 토관 국경인(鞠景仁) 등은 반란을 일으켜 가토에게 투항하고 반란군이 붙잡은 조선의 왕자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을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가토는 명천(明川) 이북의 8고을을 국경인 등의 반란 세력에게 맡기고, 길주, 성진, 단천, 이원, 북청의 5지역을 자신의 부대에서 나누어 주둔하도록 하였다.

경과

경성에 있던 북평사 정문부가 9월 초에 이 지역 군사를 모아 반격을 준비하자,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등이 합세하여 병력이 1천여명에 이르렀다. 북도의병 대장으로 추대된 정문부는 9월 16일 경성을 공격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던 반역자 국세필(鞠世弼)을 처단하고, 이어서 회령과 명천 지역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이 지역을 수복하였다. 여세를 몰아 정문부는 10월 말 정현룡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길주(吉州)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일본군을 장평(長坪)에서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이에 놀란 길주성의 일본군은 성문을 닫고 방어에 급급하였다.

고립된 길주의 일본군을 구원하기 위해 마천령(摩天嶺) 이남의 일본군이 지원에 나섰으나, 12월 이들을 쌍포(雙浦)에서 맞아 승리하였다. 이에 길주성에서 고립된 일본군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19일 결사대 1백여 명이 출격하여 길주성에서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남문에서 매복한 정문부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한편 길주 남쪽의 단천(端川)에 주둔한 일본군을 구축하기 위해 1월 22일에는 정문부의 기병 2백여 명이 출동하여 단천 인근에서 일본군을 격멸함에 따라 길주의 일본군은 더욱 고립되었다.

길주성의 일본군이 완전 고립 상태에 빠지고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수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변에 주둔하던 가토는 길주성의 일본군을 구출하여 철수하기 위해 직접 2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전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문부는 단천을 공격 중이던 군사를 일단 철수시켰다. 정문부는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길주 남쪽 임명에 매복하여 가토 군을 기다렸다. 1월 28일 임명 북쪽 백탑교에서 가토 군을 요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조선군도 피해가 적지 않아 일단 길주 북방인 명천(明川)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가토의 일본군은 간신히 길주성으로 들어가 길주에 고립된 부대와 합류하여 그날 밤중으로 서둘러 안변으로 돌아갔다.

결과

북관 일대의 패배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길주의 고립된 일본군을 구출한 가토는 길주 이남의 일본군을 2월 20일까지 함흥에 집결시켰다가 안변부로 이동시키고 동시에 안변의 병력과 함께 한성으로 철수하였다. 아울러 안전한 철수를 위해 가토는 평안도의 맹산, 양덕을 거쳐 평양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가토 군의 철수 중 측후방의 위협을 받지 않고 2월 말 안전하게 한성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정문부의 북관대첩을 통해 국경인 등 반란자를 제거하고 주민을 수습하여 내전의 화를 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신속한 한성으로의 철수를 강요함으로써 조명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참고문헌

『농포집(農圃集)』
『서애집(西厓集)』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기타지마 만지 저, 김유성·이민웅 역), 경인문화사, 2008.
『임진왜란사』(서인한,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정문부의 의병활동」(이장희, 『사총』21·22합, 1977)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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