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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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의 여성 자치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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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여성 자치단체.
내용

미국 북감리회의 여성선교는 1885년 6월 해외여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메리 스크랜턴(M. F. Scranton, 스크랜턴 대부인)의 내한으로 시작되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정동에 여학교(이화학당)를 설립하여 이곳을 여성교육과 복음전도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신분제 사회 속에서 소외된 한국의 여성들은 기독교복음 안에서 자기 해방과 자아실현의 길을 찾기 시작하였고, 1887년 10월에는 첫 감리교 여성세례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1888년 영아소동으로 인해 선교활동이 중단되는 위기를 극복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여성들을 위한 집회를 시작하였다. 여성 집회의 참석자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는 여성 세례교인의 증가로 이어졌고, 한국 최초로 여성교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여성교회는 1897년 정동제일교회가 벧엘예배당을 건축하여 남녀가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단체인 조이스회(Joyce Chapter)가 정동제일교회의 여성 교인들에 의해 조직된 것은 1897년 10월 31일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00년, 조이스회는 장년층 중심의 보호여회(保護女會, Ladies Aid Society)와 분리하였다. 조이스회가 청년 중심의 계몽운동에 치중했다면, 보호여회는 장년층이 중심이 되어 구제와 전도사업에 집중했다. 이 보호여회가 여선교회의 모체이다.

보호여회의 창립 경위는 다음과 같다.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여성들은 담임목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안식년 휴가를 앞두고, 회비를 걷어 단체사진을 찍어 선물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회비가 남게 되었다. 결국 남은 돈을 재정으로 여자 교인들 가운데 빈한한 자를 돕기로 하고 1900년 보호여회를 조직하였다. 초대 회장은 황씨 부인(여메례, 황메례)이 선출되었고, 28명으로 창립된 보호여회는 매월 1회 정기집회를 갖고, 말 그대로 가난한 여성들을 보호하고 구제하는 사업을 중점적으로 진행하면서 동시에 회원들의 친교와 교육, 전도와 봉사 사업도 병행하였다. 구제사업은 전도로 연결되었고, 조직과 활동도 확대되었다. 1903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1910년대 초반에는 동대문교회와 상동교회에도 보호여회가 조직되었다.

미국 북감리회보다 10년 늦게 한국 선교에 착수한 남감리회의 경우 1905년 개성에서 처음으로 교회 여성 조직이 탄생하였고, 이어 원산으로 확대되어 갔다. 교회 여성 조직은 한국 여성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선교운동으로 출발되었기 때문에 명칭, 목적, 체제 등이 다양하였다. 3·1운동 이후 개체 교회, 혹은 지방 단위로 흩어져있던 교회 여성 조직들을 체계화하게 되는데, 남감리회는 1920년 12월 6일 전국단위의 ‘여선교대회’를 조직하였고, 북감리회는 1924년 9월 15일 전국 단위의 ‘내외국여선교회 총회’를 조직했다. 1930년 12월 2일 남북감리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창립함에 따라 둘로 나뉘어있던 내외국여선교회 총회와 여선교대회는 1931년 6월 3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로 통합 조직되었다.

일제 말기부터 한국전쟁기에 이르는 10여 년 동안 여선교회는 존폐의 위기를 맞기도 하고, 교단 본부 산하기관으로 들어가 활동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53년 3월 18일 대전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여선교회’라는 이름을 되찾으며,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기구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1960∼70년대를 거치며 급속한 성장을 이룬 여선교회는 다양한 국내외 선교사업, 교파 연합운동, 소외 지역과 소외 계층을 향한 선교 사업을 펼치며 선교의 지평을 확대해 갔다. 1994년 현재의 자리(한남동)에 교회 여성들의 헌금으로 여선교회관을 건립하였고, 1999년에는 여선교회 100주년 기념 연수원을 제주도에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감리교여선교회의 역사』(이덕주,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전국연합회, 1991)
『한국감리교여성사(1885∼1945)』(장병욱, 성광문화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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