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지리지(地理志)와『신증동국여지승람』외에는 축성이나 활용 시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곧『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위가 2,042척에 높이는 10척이다”고 하였지만, 이미 폐성(廢城)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다만『신증동국여지승람』은 물론『증보문헌비고』,『여지도서』에서 보듯이, 봉수만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안읍 북쪽에 위치한 해발 284m의 백화산(白華山)에 있는 산성이다. 백화산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어서, 서해 방면을 비롯하여 사방의 조망이 매우 좋다. 산성은 해발 284m의 남쪽 봉우리와 해발 270m의 북쪽 봉우리를 돌로 에워싸면서 축조하였다. 평면은 일정하지 않으며, 둘레는 약 730m이다. 성벽은 장병형으로 다듬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성 안에는 문터, 건물터, 치성(雉城), 우물 등이 남아 있다. 동문터는 북쪽 봉우리와 남쪽 봉우리를 잇는 능선이 만나는 마안부(馬鞍部)에 위치하며, 서문터는 군사도로를 내면서 파괴되어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성 안에는 평평한 대지가 곳곳에 있어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와 조각이나 토기 조각, 자기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제법 많은 양이 출토된 기와 조각은 선조무늬[線條文]와 민무늬[無文]가 대부분이다.
한편, 백화산의 남쪽 봉우리 정상부에는 백화산성의 남쪽 성벽과 동쪽 성벽이 연결되는 곳에 봉수(烽燧)가 있다. 백화산 봉수는 처음으로 만든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조선 후기에 전라도 순천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5거(炬) 봉수 노선에 속한 간봉(間烽)이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쪽으로 서산 북산 주산(主山) 봉수, 남쪽으로는 서산 도비산(都飛山) 봉수와 연결된다고 하였다.『증보문헌비고』의 봉수망 가운데 5거에는 3개의 간봉이 있었는데, 백화산 봉수는 간봉2에 해당되었다. 곧 전라도 옥구에서 갈라져 충청도 서해안을 따라 연결되는 간봉 노선에 속하였다.
이 산성은 정밀지표조사 결과, 입지와 성벽의 축성 방법, 규모, 수습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