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3·1운동 ( )

근대사
사건
1919년 3월 23일부터 31일까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과 제원면, 서대산, 복수면 등에서 7차례에 걸쳐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19년 3월 23일부터 31일까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과 제원면, 서대산, 복수면 등에서 7차례에 걸쳐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3·1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금산 지역은 충청남도가 아닌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에 속한 지역이었다. 전라도의 3·1운동은 전라남도와 북도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의 3·1운동은 전라남도보다 먼저 일어났을 뿐 아니라 훨씬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전라남도는 전라북도보다는 늦게 일어났던 반면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남북도에서는 3월 상순에서 4월 상순경까지 약 40일 동안 수많은 학생과 청년, 민중이 힘을 모아 민족의 자주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1. 금산읍 1차 시위

금산면에 거주하고 있던 김용술(金用述)과 임승환(任勝煥)은 여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3·1운동과 연계하여 금산군에서도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3월 22일 상옥리(上玉里)에 위치한 김용술의 집에서 각 면의 대표 20여 명이 모여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격문을 작성하였다.

금산읍 장날이었던 3월 23일 아침, 구호열(具浩烈)과 변희조(卞熺朝) 등은 시장으로 몰려드는 정필종(鄭必鍾) · 김태석(金泰碩) · 김일찬(金日賛) 및 장꾼들에게 전날 인쇄한 ‘금산 경고’를 배포하였다. 그리고 격문에 표시된 시간인 오후 2시경에는 김용술과 임승환이 20여 명의 청년과 함께 지정된 장소인 우시장 상부에 나타나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주변 사람들을 선동했다. 이 소리에 주위에 있던 수천 명의 군중이 호응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금산읍 헌병 분대가 긴급히 출동하였고, 김용술을 비롯한 몇몇 주동 청년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일제는 공포를 쏘며 몽둥이를 뒤흔드는 등 군중들을 짓밟았으나 주민들은 쉽게 해산하지 않았다. 일제는 주모자인 전위부대에 잉크를 뿌려 표식을 할 계획까지 하였으며, 임승환도 체포되었다. 이날의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수천 명이었다는 점만 확인할 수 있다.

그날 밤 10시경 금산 읍내에 위치한 남산 밑에서 김일남(金一南) 등 30여 명이 선두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읍내를 향해 행진하였다. 주민들도 뛰어나와 동참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제지되었다.

  1. 제원면

3월 25일에는 금산읍의 동쪽에 위치한 제원면(濟原面) 제원리(濟原里)에서 만세 시위가 또다시 전개되었다. 제원리에 살고 있던 청년 박영규(朴瑛圭)는 미리부터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고 있던 중에 23일 전개된 금산읍 장터의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 결심을 확고하게 굳혔다. 그리하여 25일 저녁에 본인의 집에서 한지에 태극을 그려 넣고 양쪽에 한자와 국문으로 ‘한국 독립 만만세’라는 글귀를 쓴 태극기와 유사한 깃발을 만들어 수숫대에 매달았다. 그리고 동네 중앙에 매달아 놓은 종과 북을 떼 내어 두드리면서 주민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박영규는 이렇게 모인 주민 2백여 명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마을을 돌고 또 돌기를 반복했다.

다음날인 26일 오후 4시경에 박영규는 또다시 도로 부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여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날 밤에도 박영규는 몇몇의 청년들과 함께 마을 앞길을 행진하며 운동을 계속하였다. 금산 헌병 분대에서 제지하였으나 그는 굽히지 않고 외려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1. 금산읍 2차 시위

3월 28일(음 2월 27일) 금산읍 장에는 23일에 있었던 만세 운동을 한차례 겪은 헌병들이 이른 아침부터 경계를 했다. 더욱이 이날은 군수 및 친일 인사들까지 동원되어 주민들의 행동을 감시하였다. 별다른 움직임 없이 오후 6시쯤 상점들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고, 노점과 행상인들도 짐을 싸기 시작하자 일제도 안심하는 듯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려는 것처럼 서성대던 수백 명의 군중들이 갑자기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 정연하게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모여 서있던 민중들도 따라 나서기 시작하면서 인원은 점점 증가하였다. 선언서와 격려문도 배포되었다. 당황한 헌병대는 공포를 발사하며 군중들의 해산을 요구했지만 시위 대열은 무너지지 않고 시가지를 행진했다. 너무도 질서정연한 군중들의 행동 때문에 일본 헌병대도 감히 제지하지 못하였다.

밤 10시경에는 다시 서대산(西臺山)에서 봉화가 오르면서 읍내를 비롯하여 금산군내의 각 마을에서 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워낙 늦은 밤이기도 했고 금산군의 각 마을마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헌병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금산면의 김현재(金現在), 한철종(韓喆宗), 김봉준(金奉俊), 정해준(鄭海駿) 등 20여 명을 구속하였다.

  1. 복수면

3월 31일에는 또다시 복수면(福壽面) 곡남리(谷南里)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곡남리에 거주하고 있던 김영호(金永浩)와 정재철(鄭在轍), 오연구(吳然九) 등이 곡남리 앞길에서 오후 2시경 인근 주민들과 함께 도로를 수리하면서 주민들에게 각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 운동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곧바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앞장섰고, 함께 도로 수리 공사를 하고 있던 수영리(壽永里)의 주민 약 2백 명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만세를 불렀다. 곡남리에 살고 있던 유영준(兪英濬) 등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마침 이때 도로 공사를 감독하러 나왔던 헌병들이 이들을 제지하려고 나섰지만, 김영호와 오연구 등은 이를 묵살하고 계속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의 대열을 지휘하면서 만세 행렬은 더욱 커졌다. 곧이어 진산면(珍山面) 헌병 주재소에서 응원대가 급하게 파견되어 일시적으로 만세 시위가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김영호 등은 문서를 만들어 백암리(白岩里) 구장 등에게 전달하였고, 뿐만 아니라 낮에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해야 한다며 주민들을 선동하였다. 그날 밤 11시경에 2백여 명이 다시 소리 높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형성하여 진산면(珍山面) 읍내로 향하며 행진하였다. 만세 소리가 한밤중에 산천을 진동시키는 장면은 감격적이었다. 결국 진산 헌병 주재소 헌병의 출동으로 군중은 해산되었고 김영호와 정재철 등 7명이 구속당하였다.

금산의 3·1운동은 이후에도 늦은 밤을 이용하여 산 위에서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산 위에서의 횃불 만세 시위로 하홍학(河洪學)은 피살되었고, 한철종(韓喆宗), 김현재(金現在)는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금산의 3·1운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우선 7차례의 시위 중 폭력적인 시위는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은 채 3차례의 적극 시위와 4차례의 단순 시위의 형태로 발생했다는 점, 전라북도에서 3·1운동에 참여한 약 7만 7천여 명 중 2%에 해당하는 1500명이 금산의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점, 시위 발생 장소는 금산읍의 장터에서 2차례 일어났으며, 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벌어졌던 날은 어김없이 같은 날 밤에 산 위에서 횃불 시위가 진행되었다는 점, 전라북도에서 거의 가장 적은 횟수의 시위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병이 출동한 횟수가 4차례로 가장 많을 뿐 아니라 발포된 횟수도 가장 많은 2차례라는 점, 시위 횟수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23명이라는 많은 피검자들이 발생했다는 점, 3·1운동의 주도층은 100% 모두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전라북도의 주도층 가운데 농업에 종사했던 63명의 10%에 해당하는 인원이 금산 군민이었다는 점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즉, 금산의 3·1운동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에서 거의 가장 적은 7차례의 시위 횟수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도층들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강도 높은 수준으로 받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일지(육)(獨立運動日誌(六))」(『독립신문』, 1919.9.13)
『금산군지』(금산군지편찬위원회, 1987)
『독립운동사』6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독립운동사』3권·5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일제강점기 금산의 3·1독립만세운동」(정을경,『충청학과 충청문화』12, 2011)
『충남지방 3·1운동 연구』(김진호, 2002,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3·1운동의 지역별 주도세력 연구』(이창건, 대구효성가톨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2)
「전북지방의 3·1운동에 대한 연구」(김남수, 고려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 석사학위논문, 1989)
「전북지방의 일제하 항일학생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최근무, 건국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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