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호는 일제강점기 천도교의 제4대 교주이다. 1855년(철종 6)에 태어나 1940년에 사망했다. 초명은 박용호(朴龍浩), 이명(異名)은 박남수(朴南壽)이다. 1883년 동학에 입도하여 광화문과 보은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개편된 후 1908년 천도교 제4대 교주가 되었다. 교단의 조직과 규칙을 개편하고 교리강습소를 설립하여 교육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등 민족운동에 참여하였으며 6·10만세운동을 지원하고 멸왜기도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박인호(朴寅浩)의 자는 도일(道一), 호는 춘암(春菴)이며, 초명(初名)은 박용호(朴龍浩), 이명(異名)은 박남수(朴南壽)이다. 밀양 박씨로, 신라 54대 경명왕의 장자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의 37대손이다.
1855년 충청남도 덕산군 양촌면 막동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집안은 빈농(貧農)으로 매우 가난하였다. 11세 되던 해에 한학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15세 무렵에는 지가서(地家書)와 의서(醫書) 등을 공부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였다. 동학 및 천도교 교주가 되어 교단의 발전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쓰다 1940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1883년 동학에 입도하여, 광화문 복합 상소와 보은 장내리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면서 교단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덕산의 대접주로서 승전곡전투와 신례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에는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주도하면서 동학교도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개편된 후 1907년 차도주(次道主)를 거쳐 1908년 천도교 제4대 교주가 되었다. 교주로서 박인호는 첫째, 교단의 조직과 규칙을 개편하여 교단을 안정시켰다. 둘째, 교육문화운동을 진행하였다. 1908년에 교리강습소를 전국적으로 설립하여 수천 명의 교역자를 양성하였으며, 교육운동의 체계화를 위하여 사범강습소를 개설하였다. 또한 부인전교사와 부인순회교사를 지방마다 선정하여 여성포덕과 교육에도 힘썼다.
강습소를 통해 배출된 교인들은 이후 천도교 발전의 근간이 되었으며, 3․1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박인호는 교육운동의 외연을 확대하여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동덕여학교, 양덕여자학교, 삼호보성소학교, 문창학교 등 등 7개의 학교를 인계하여 관리하였다. 아울러 종교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리서 발간과 교리강습소 운영, 기관지 발간 등을 활발히 하였으며, 박인호 자신도 교단의 지침서가 될 『신언(神言)』과 『천도교서(天道敎書)』를 직접 편술하였다.
셋째, 민족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우선 3 · 1운동의 봉기 자금으로 3차례에 걸쳐 총 6만 5,000원을 지원하였다. 비록 교주로서 교단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천도교대표 15인에서는 제외되었지만, 교인들에게 3 · 1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또한 윤익선과 함께 독립선언서 발표의 전말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원고도 작성하였다. 이는 3월 1일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던 민중들에게 배포되었다.
또 3 · 1운동으로 교단의 재산이 일본에 의해 압수되자 이정화를 통하여 강계교구모금운동을 지시하였다. 결국 박인호는 3월 10일 독립운동자금 모집 혐의로 피검되었으며, 1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수형생활을 마친 박인호는 1922년 1월 18일 다시 교주로 취임하였으나 신구파의 갈등으로 6월 6일 교주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민족운동에의 열정은 계속되었다. 조카 박래원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6 · 10만세운동에 필요한 제반 지원을 하였으며, 1927년에는 아들인 박래홍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을 신간회에 참여시켜 활동하게 하였다.
또한 지병이 악화되어 활동이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는 멸왜기도운동(滅倭祈禱運動)을 전개하였다. 멸왜기도운동은 ①교인들의 정신적인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식고문(食告文)을 아침, 저녁 식사 때마다 시행하는 계획과 ②구파의 국권회복의 기회에 대비하여 활동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특별 희사금 모집 계획, ③일본을 소멸하여 독립을 기원하는 의지를 담고 있는 멸왜기도문으로 특별 기도를 실시하는 세 가지 계획으로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황해도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병석에 누워있던 박인호는 멸왜기도운동을 끝으로 1938년 교단의 일을 권동진과 오세창, 최린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1940년 4월 3일 86세로 영면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