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3월 24일 충청남도 대전군 기성면 원정리 덕동(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덕골)에서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의 8대 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 김도의(金道義)이며, 어머니는 은진 송씨 송헌달(宋憲達)의 딸이다. 양반의 후예이나 경제적으로는 소농(小農)이었다. 김용원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청수하고 맑고 지혜로웠으며 유희를 즐겨하지 않았다 하며, 7세부터 부친에게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지식이 필요하다고 판단, 1912년 늦은 나이에 상경하여 중동학교와 휘문의숙에서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1919년 오근영(吳根榮), 전협(全協) 등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대동단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의친왕 이강(李堈)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의친왕의 탈출 공작을 추진하였다. 1919년 11월 10일 김용원 등은 의친왕과 함께 변장을 하고 수색역에서 안동행 열차를 탔다. 그러나 안동역에 도착할 무렵 경찰에게 적발되어 실패하였다. 김용원은 요행히 체포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대동단은 거의 붕괴되었다.
김용원은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그 뒤 무장활동을 통한 독립의 길을 모색하여 중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하기도 하였으나 병으로 1924년 귀국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여 1924년 7월경부터 9월까지 총 38원 50전을 모금하였다고 전한다. 1924년 8월 오근영과 함께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남창리 이규연(李圭淵)의 집으로 들어가 액면가 500원이 적혀있는 조선독립공채를 교부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어 1924년 9월 체포되었다.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병이 재발하여 1925년 1월 7일에 형집행정지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출옥 이후에 또다시 군자금모금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수감되고,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 석방되는 등 여러 차례의 수감과 병보석을 반복하였다. 1934년 2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그해 7월 옥고의 여독으로 결국 순국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