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길(黃炳吉)은 일제강점기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면 송천동의 소작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황오섭이다. 서당에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으나 향학열이 높아 또래들의 글 읽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며 독학하였다. 훈춘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병이 들어 1920년 6월 1일 훈춘에서 사망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황병길은 만주로 이주해 이범윤(李範允)이 조직한 산포총대(山砲總隊)에 가입하여 안중근, 최재형, 엄창섭(嚴昌燮)과 함께 회령, 부령, 경성, 온성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연해주로 이주한 후 연추에서 안중근, 백규삼 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였다.
1911년 연추에서 훈춘으로 재 이주한 뒤에는 훈춘 기독교우회 부속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독립군 인재 양성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훈춘 순경국 소속 관헌으로서, 황병길은 독립운동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중국 관헌과 협조체제 유지에 노력하였으며, 조직적인 군자금 모집에도 힘썼다.
1917년 일제는 북간도 지역에서 한인을 이용한 침략세력 확장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중요한 항일독립운동가였던 황병길, 양하구 등을 체포하여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관광을 권유, 친일세력을 늘리려 하였다. 일제의 강박으로 황병길은 경성시찰단(京城視察團)의 단장을 맡게 되었지만 독립에 대한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황병길은 1919년 3 · 1운동 이후 만주의 무장독립운동단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모집대장을 맡아 독립군 및 군자금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이를 더욱 조직화하기 위해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설립했다.
황병길은 각종 조직들을 활용하여 군자금 64루블을 모금하였고, 전상병자의 치료, 구제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국민의회 훈춘지부 산하의 급진단(急進團)을 영도하면서 노령지역에서 무기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소총 103자루, 탄환 5,000여발, 군자금 85만 6,000여 루불을 확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정사후원회(軍政司後援會) 연길현 숭례향(崇禮鄕)의 책임자로도 활동하였다.
급진단은 이후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의사단(義士團), 포수단(砲手團)과 통합해 군무부(軍務部)로 개편되었다. 황병길은 1920년 군무부장(軍務部長)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 함경북도의 고건원(古乾源) · 용당(龍堂) · 경흥(慶興) 일대에서 왜정기관을 폭파하고 왜밀정을 살해하는 등 일제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였지만, 순국하기 전까지 훈춘과 연해주를 연결하면서 군대 양성과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