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동맹 ()

근대사
단체
1909년 2월 7일 러시아 그라스키노[延秋] 근처 카리[下里]에서 안중근을 중심으로 결성된 소규모 결사대.
이칭
이칭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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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9년 2월 7일 러시아 그라스키노[延秋] 근처 카리[下里]에서 안중근을 중심으로 결성된 소규모 결사대.
개설

안중근을 비롯한 12명의 동지들이 일본의 지배가 국내외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던 와중에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결성하였다.

설립목적

안중근이 직접 작성한 동의단지회의 「취지서」에 따르면, 단지동맹은 조선의 이천만 동포가 일심 단결하여 생사를 무릅쓰고 투쟁을 전개하여야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결성되었다.

연원 및 변천

안중근이 주도한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안중근 자신도 적의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풀어주어 오히려 위험을 자초하는 등 동료들로부터 신뢰를 잃어갔다.

그는 국가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재기를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조국의 절박한 처지에서 생사를 불문하고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행동으로 국권을 회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특별한 단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안중근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준비를 하기 위해 러시아의 연추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를 도와준 사람이 최재형이란 한인 부자였다. 최재형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이동한 대부분의 민족운동가에게 물심양면으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안중근은 1909년 2월 7일 그라스키노 근처 카리에 있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여관에서 김기룡, 백규삼 등과 만나 의병활동 방안을 협의하고 동의단지회란 소규모 결사대를 결성하였다. 12명의 동지는 왼손의 약지(藥指)를 끊어 피로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란 글자를 쓰며 맹세하였다.

또한 안중근은 엄인섭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김기룡 등과 함께 이완용, 박제순, 송병준 등의 친일파를 암살하기로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후 열린 제6회 공판에서 단지동맹에 참여한 사람이 자신을 포함하여 김기룡, 강기순,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조순응, 황병길, 백남규, 김백춘, 김천화, 강계찬 12명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다른 자료들에는 엄인섭, 백원보, 한종호도 단지동맹원이었다고 나온다.

이후 안중근은 연추에 집을 지어 살며 『대동공보(大東共報)』의 탐방원이자 중간판매원으로 일하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는 10월 26일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는 거사를 단행하였다.

참고문헌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안중근」(박환, 『한국민족운동사연구』30,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2002)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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