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추는 러시아 연해주에 있었던 한인 마을이다. 시모노보, 얀치헤(延秋, 煙秋, 烟秋)라고도 한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옆을 흐르는 강인 연추하(延秋河)를 따서 붙였다. 1863년에 한인들이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에 마을을 이루었다. 1868년에 지신허 마을에서 서쪽으로 14㎞ 떨어진 연추 강변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1923년 중연추 마을이 집단 농장으로 개조되었다. 1937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마을 주민이 강제 이주되면서 상연추 마을도 폐쇄되었다. 1972년에 하연추 마을 이름을 러시아어인 추카노보로 바꾸었다.
러시아 연해주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다. 1868년에 형성되어 상 · 중 · 하 3개의 마을로 나뉠 정도로 큰 규모였다. 1923년과 1937년에 연이어 2개의 마을이 폐쇄되었고, 중심지였던 하연추는 추카노보(Цуканово, Tsukanovo)라고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추카노보의 주변에 위치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옆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인 연추하(延秋河)를 따서 붙였다. 러시아어로는 처음에 시모노보(Симоново, Simonovo)라고 불렸다가 뒤에 얀치헤(Янчихe, Yanchihe)라고 표기하였다. 다만 한인들은 중국식 발음으로 부르면서 한자로 ‘煙秋’, ‘延秋’, ‘烟秋’라고 썼다.
산골짜기를 따라 동서로는 6~7리, 남북으로는 27리 정도의 넓은 평지에 집들이 흩어져 있는 농촌 마을이다. 중국의 훈춘[琿春]에서는 남쪽으로 30리 가량 떨어져 있고, 지금은 크라스키노(Краскино, Kraskino)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군영인 노보키예프스키(Новокиевский, Novokiyevskiy)에서 북쪽으로 10리 거리에 자리하였다. 강변의 기름진 땅을 경작지로 삼았고, 주변의 군영에서 큰 규모의 토목공사를 하여 경제적으로는 늘 넉넉한 편이었다.
1863년에 한인들은 영구 정착을 목적으로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와 지신허(地新墟) 마을을 이루었다. 그 뒤 1868년에 한인 일부가 지신허 마을에서 서쪽으로 14㎞ 떨어진 연추 강변으로 옮겨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은 점차 규모가 커져서, 1885년경에는 237가구 1,623명, 1906년 말경에는 약 300가구 1,900여 명이 살았다.
1890년대에는 마을의 중심인 하(下)연추와 함께 북쪽으로 10여 km 정도 떨어진 곳에 상(上)연추가 들어섰으며, 1906년 말 이후에는 농민 가구들이 점차 늘어나서 중(中)연추도 생겼다. 1914년에 상 · 중 · 하 연추에는 모두 400가구 2,000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특히 하연추에는 1870년대 이후에 학교와 교회가 자리하기도 하였다. 1893년에 한인의 국적 취득이 허용되자, 한인 자치행정조직인 도회소(都會所)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남도소(南都所)라고 불렸다.
도회소 초대 책임관리자는 도헌(都軒)이라고 하였는데, 각 마을에서 주민 업무를 담당하는 노야(老爺)를 통해서 전체 업무를 총괄하였고, 한편으로는 러시아 군대가 발주한 대규모 토목공사 등을 따내어 마을의 경제적인 부를 늘려갔다. 특히 관혼상장(冠婚喪葬) 등의 풍습에서도 조선의 예의범절을 지켰고, 서양식 학교와 함께 서당을 운영하면서조선의 법도를 잊지 않도록 애썼다. 이러한 연추 마을의 발전은 도헌을 맡은 최재형(崔在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극동 지역도 점차 공산주의화되었다. 1923년 이후에 연추 마을은 집단 농장으로 개조되었는데, 이 때 중연추 마을이 가장 먼저 폐쇄되었다.
1937년에 한인들이 강제 이주되었을 때도 상연추 마을의 주민이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크즐오르다(Kyzylorda)로 이주되면서 마을도 폐쇄되었다. 하연추 마을만 러시아 마을로 바뀌어 남았는데, 1972년에 마을 이름을 러시아어인 추카노보로 바꾸고서 오늘에 이른다.
이 마을은 연해주 일대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자 동의회(同義會)가 결성된 연해주 의병 본부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20세기 초의 독립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