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의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인 1906년 제정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 가운데 당시 연해주 사회에서 경제력 및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한인공동체 지도자 최재형은 연해주 남부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의병부대를 직접 지휘하거나, 이범윤 등과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전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1년 5월 21일 57명의 주요 항일인사들로 구성된 블라디보스톡 비밀회의에서 애국단체『권업회』가 조직되었다. 최재형은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한때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나흘 후 방면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재형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항일활동 배후에는 한인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최재형(崔在亨)은 대한제국 조선 왕조의 독립운동가로 러시아식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령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귀화했다. 상업으로 치부하여 노우키예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자, 연봉을 은행에 적립하여 그 이자로 동포 자녀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소위로 경무관 부속 통역관이 되어 활동하는 한편, 남부소집회감독(南部所集會監督)으로 러시아 군부의 지원 하에 동포들을 규합했다. 또한 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과 결의형제하고 그를 지원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여 다수의 군인들이 러시아령으로 넘어오자, 이범윤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최병준(崔秉俊)·엄인섭(嚴仁燮)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듬 해 3월 이위종(李瑋鍾)으로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지원받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함께 독립군 600명을 훈련시킨 다음,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 회령 영산(永山)에서 일본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어 노우키예프스크에 박춘근(朴春根)이 이끄는 독립군 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러시아군에 쇠고기 기름 등을 납품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동포 사회의 정착을 지원했다.
엄인섭·김서윤(金瑞允)·이위종 등과 독립운동단체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2월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인수하여 『대동공보(大東共報』로 개칭·재간행하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에 한인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1911년 신한촌(新韓村)에서 홍범도(洪範圖)·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추진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청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1920년 4월 초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재러한인독립군부대를 총집결하고 사단장이 되어 러시아 적군과 함께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김이직(金利稷)·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周珌) 등과 함께 체포되다.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일본헌병본부로 압송되는 도중 탈출했으나 니콜스크시 남쪽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일본군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1858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한 최재형은 1869년 아버지 최흥백, 형 알렉세이와 함께 연해주 남부 진신허 마을로 이주했다. 1871년 집을 나와 전전하다가 포시에트 선착장에서 러시아 선원들에게 발탁되어, 러시아 함대의 견습수부가 되었다. 그 후 그는 1878년부터는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1882년에는 블라디보스톡-라즈돌노예-슬라뱐카-노보키예프스크-크라스노예 셀로를 잇는 전략도로 건설부에서 통역원으로도 일하며 많은 인생 경험을 쌓아나갔다.
이후 최재형은 군수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최재형은 한국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활동하였는데, 한국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기여한 덕분에 연추의 한국인 사회에서 도헌(군수 정도 되는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서의 위치가 높아졌다. 1893년 최재형은 얀치헤(연추) 한인 마을의 책임자(읍장)로 선출되면서 그는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지역 한인들로부터 높은 신뢰와 덕망을 쌓아나갔으며, 1896년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의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 1906년 최재형은 연해주 남부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의병부대를 직접 지휘하거나, 이범윤 등과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전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1년 5월 21일 57명의 주요 항일인사들로 구성된 블라디보스톡 비밀회의에서 애국단체『권업회』가 조직되었다. 최재형은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한때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나흘 후 방면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재형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항일활동 배후에는 한인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1913년 최재형은 7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의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으며, 1914년 1월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주년 기념 행사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15년 슬라뱐카 마을에서 헌병에게 재차 체포되어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로 이송되었다가 여론의 압력으로 11일 후 석방되는 등, 또 한번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7년 최재형은 이번에는 얀치헤 집행위원회 대표로, 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부 장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18-1920년 내전시기 동안에는 새로운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백위파를 지원하는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서 최재형은 일제의 주요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 4월 5일 새벽 최재형은 일본군에 의해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감행된 학살만행 과정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최재형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항일운동을 위해 대부분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의병들을 옛 소비에트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키기도 했으며, 러시아의 모든 항일 의병 세력을 단결시킨 동의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지원한 인물이다.『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던 최재형에게 안중근의사가 찾아온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이후 연해주의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의 감시가 강화되었고,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최재형도 그를 간첩으로 몬 일본의 음모로 체포되었다. 곧 무혐의 결정으로 석방되었으나, 러시아정부에서 더 이상 그와 상거래를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최재형은 1920년 러시아의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현재 최재형의 후손들이 러시아 모스크바와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다.
1962년 최재형의 후손에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