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박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박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서남단에 위치한 군.
이칭
이칭
박주
정의
평안북도 서남단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영변군, 서쪽은 정주군, 남쪽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평안남도 안주군, 북쪽은 태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18′∼125°42′, 북위 39°34°∼39°48′에 위치하며, 면적 528.9㎢, 인구 8만 9460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7개 면 91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박천읍 북부동이다.

자연환경

서북부에 적유령산맥의 여맥이 뻗어 화강암으로 된 300∼400m 정도의 노년(老年) 저산성 구릉의 기복이 많으며, 대표적인 산으로 봉린산(鳳麟山, 217m)·청룡산(靑龍山, 323m)·봉두산(鳳頭山, 394m)·황계산(黃鷄山, 363m)·목우산(牧牛山, 416m)·칠악산(七嶽山, 365m) 등이 있다.

청천강이 남쪽 경계를 따라 흐르고, 삭주군의 계반령(界畔嶺)에서 발원한 대령강이 군의 중앙을 동북에서 서남방향으로 흐르며 계지천(桂之川)·홍경래강(洪景來江)·장수탄강(長水灘江) 등의 지류를 합류해 청천강으로 흘러드는데, 총길이는 약 150㎞에 달한다.

대령강의 하류지역에 군내에서 제일 큰 박천평야가 펼쳐져 있고, 대령강과 청천강의 합수지점인 덕안면 일대에는 충적토질의 노전지대(蘆田地帶)가 형성되어 있으며, 삼가(三嘉)·서면(西面) 등의 평야가 발달해 있다. 한편, 삼가저수지가 있어 농업관개용수로 이용된다.

지질은 시생대 화강편마암계이다. 대륙성 기후로 한서의 차가 크며 연평균기온은 9℃, 1월 평균기온 -10℃, 8월 평균기온 24.8℃로 한서의 차가 34℃에 달한다. 연강수량은 1,168.5㎜이다. 서리는 10월 초순경부터 내리기 시작해 다음 해 4월 초순까지 내린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이웃의 정주군 덕언면 대산동과 영변군 오리면 세죽동에서 신석기시대의 조개무지와 주거지가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이 곳에도 선사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시대에 들어와 중국 전국시대 7국의 하나인 연(燕)이 소왕연간(昭王年間:기원전 312∼279)에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을 치고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 만번한이 지금의 박천이라는 설이 있다.

진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철산군·중강군·자성군·희천군·영변군에서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곳에도 중국인이 들어와 무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위만조선을 거쳐 고구려의 영지가 되었으므로 이 곳에 군현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에는 전하지 않는다. 발해시대에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에 속하였다.

[고 려]

박천은 본래 박릉군(博陵郡) 또는 덕창(德昌)이라 했는데, 947년(정종 2) 덕창진과 박주(博州)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는 북진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이 때 이미 청천강을 넘어 착실히 북계를 개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93년(성종 12) 강동6주를 수복한 뒤 이 곳의 방어를 굳건히 하기 위해 995년에 방어사를 두었다. 1010년(현종 1) 제2차 거란침입 때 거란병이 청수강(淸水江 : 청성강의 별칭)에 이르자 안북도호부사 박섬(朴暹)이 성을 버리고 도망했기 때문에 주민이 모두 궤멸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때 박주성도 함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231년(고종 18) 제1차 몽고침입 때 박주는 몽고병의 병화(兵禍)에서 벗어난 해도(海島)에 속해 있다가, 1261년(원종 2)가주(嘉州)에 예속되었다. 이 때 가주는 태(泰)·박(博)·무(撫)·위(渭)의 4주를 예속 통할했으나, 1371년(공민왕 20)에 박주는 다시 독립하였다.

[조 선]

1413년(태종 13) 10월에 비로소 박천군으로 되어 지군사(知郡事)가 설치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호구는 599호에 1,035명이었다. 그 뒤 박천군은 너무 작다는 이유로 영변군에 영속되었고, 1464년(세조 10)에 다시 독립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1459년 박천이 큰 강을 끼고 있다 해 진(鎭)을 설치했는데 영변진관(寧邊鎭管)에 속해 병마동첨절제사를 두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은 개전 일주일 만에 청북지방을 석권하고 바로 청천강을 건너 안주·평양을 차례로 점령하고 남하했는데, 길목인 이 곳도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며 병자호란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5개 면에 호구는 4,790호, 1만 6570명이었다.

1811년(순조 11) 12월 관서지방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겨우 15∼16일 만에 청북 박천·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용천·태천의 8개 고을이 반군의 손에 들어갔다. 처음 홍경래는 박천군 바로 이웃인 가산 다복동(多福洞)을 근거로 우군칙(禹君則)·이희저(李禧著)·김창시(金昌始) 등과 같이 모의를 거듭해 12월 18일 밤에 가산군수 정기(鄭蓍) 부자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이틀 뒤 박천을 점령했으나, 송림동에서 관군과의 첫 전투에서 패하고 정주로 후퇴해 항전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4월 성이 함락됨으로써 홍경래의 난은 실패하고 말았다.

[근 대]

박천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를 개혁할 때 군으로서 의주부에 속했다가, 이듬해 전국을 도제로 환원할 때는 평안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을사조약 후인 1907년 행정구역은 군내면·서면·동면·남면·덕안면의 5개 면으로 나뉘어 호수 3,233호, 인구 1만 2946명이 되었다.

1913년 가산군을 병합하는 한편, 덕안면 박비리·중흥리를 평안남도 안주군에 이속시키는 대신 안주군 청산면 여북리·원흥리·원일리·운학리 등 청천강 이북지역을 편입시켜 군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1943년에 1읍 7면에 호수 1만 5620호, 인구 9만 1506명이 되었다.

근대인물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는데, 상해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을 지냈던 유동열(柳東悅)이 박천읍 출신이다. 또 같은 박천읍 출신의 박병강(朴炳彊)은 1900년 유인석(柳麟錫)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의병에 가담하고, 1920년에 상해에서 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의 후원으로 일간지 『사민보(四民報)』를 발간해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동남면 출신의 현익철(玄益哲)은 일찍이 만주로 망명해 국민부(國民府)와 조선혁명당에서 활약하다가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해 조선혁명당을 이끌었으나, 1938년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이운환(李雲煥)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 밖에 1921년 4월 연통제십이인사건(聯通制十二人事件)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른 서면 출신의 김두극(金斗極) 등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유물·유적

덕성리에서 낙랑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고분이 발굴되었다. 가산면 동문동과 봉소동을 잇는 석축 성곽이 있는데 높이 3m, 폭 2.5m, 총길이 1,000여m에 달하는 규모이나 대부분이 퇴락해 황폐화되었다. 송덕동 남쪽에는 박릉토성(博陵土城)이 있다.

불교유적으로는 동남면 당상동봉린산 중턱에 있는 심원사(深源寺)가 유명하다. 고려 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전해 오며, 1368년(공민왕 17)에 중건되었다.

이 절의 금당인 보광전(普光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10개의 문짝이 있는데 일반적인 고정 문살 대신 모란꽃·연꽃·매화꽃 등으로 장식한 문짝을 계절에 따라 교대로 부착, 사용하도록 만든 것이 특색이다.

유교유적으로는 서면 근장동의 육영서원(育英書院)과 박천읍 원남동의 아어서원(亞於書院) 외에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어의동의 심곡사(心谷祠)와 윤관(尹瓘)을 모시는 서면 금계동의 조양사(朝陽祠), 가산면 동문동의 충렬사(忠烈祠), 박천읍 봉하동의 지천사(遲川祠), 용흥동의 봉강사(鳳崗祠), 봉하동의 봉명사(鳳鳴祠) 등의 사우가 있다.

이 밖에 박천읍 송덕동에 주필각(駐蹕閣)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이 곳에 신하들과 같이 피난했던 당시의 행적을 수록한 비석 박천성적비(博川聖蹟碑)가 있다.

태봉산(台峰山) 서북쪽에는 영파정(暎波亭)이 있는데, 정자 아래로 대령강이 흐르며 강 건너편에는 청룡산이 있고 은모래사장·초원·원수봉절벽 등이 있어 아름다운 절경을 이룬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박천읍 송덕동에 박천향교, 가산면 동문동에 가산향교가 있어 지방의 많은 유생을 교육시켰다. 근대교육기관은 1902년 유종주(柳淙柱)와 최종궤(崔宗机)가 박천읍 북부동에 박명학원(博明學院:뒤의 臺峰公立普通學校)을 설립한 것이 최초이다.

1905년 이경린(李鏡麟)과 이경구(李鏡龜)가 서면 근장동에 육영학원(育英學院)을 설립했으나 1909년에 폐교당했고, 1907년 윤최명(尹最明) 등이 가산면 동문동에 봉명학원(鳳鳴學院:뒤의 嘉山公立普通學校)을 개교하였다. 1908년에는 양봉제(梁鳳濟)가 덕안면 동사동에 덕명학원(德明學院:뒤의 德安公立普通學校)을 설립하였다.

또 1924년에 박천유치원이 개원했고, 1934년에는 양가면 서동동에 금석산농사학교(金石山農士學校:뒤의 嶺美中學校)가 개교하였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1개, 국민학교 32개교가 있다. 종교기관은 불교사찰 2개, 천주교성당 1개, 개신교교회 11개가 있다. 〈嚴永植〉

이 고장에 전해 오는 구전 설화 중에는 명당바위와 원수봉 마시암에 관한 것이 있다. 〈명당바위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한 길손이 날이 저물어 봉서동 봉두산 기슭의 명당바위 위에 있는 묘 옆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는데, 한밤중 꿈속에서 백발노인이 그 묘에서 나와 안산에 있는 아들의 묘를 향해 “몇 대 후손 아무개가 과거에 급제했는데 알고 있느냐.”라고 하자, 아들 묘에서 “내일 관가에 도착한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노인은 간 데 없고 묘만 있었다. 날이 밝자 이 사실을 관가에 고하러 갔더니 벌써 과거급제한 장본인이 관가에 도착해 있었다고 한다.

이 명당바위는 개구리모양으로 생겼는데, 문수봉이 뱀인데도 잡히지 않는 것은 그 중간에 내가 흐르고 있는 까닭으로, 그 때문에 명당이라고 한다. 이 묘의 주인은 인동장씨(仁同張氏) 중 훈련대장을 지낸 장공후(張公厚)인데, 그 후손의 번영이 이 묘의 덕택이라고 전한다.

〈원수봉 마시암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원수봉 기슭에 오막살이집 한 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집 아낙네 혼자서 옥동자를 낳았다.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아기를 낳은 다음 날 부엌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데, 어린아이 혼자 있는 방에서 말소리가 들려 이상하게 생각되어 방문을 열고 보니 갓난아기가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낙네는 이를 관가에서 알면 전 식구가 몰살될까 두려워 이 초인적인 자기 아들을 팥섬으로 눌러 죽였다. 그 뒤부터 원수봉 절벽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장군을 잃은 말의 구슬픈 하소연이라고 한다. 그 뒤 말이 나왔다는 산을 장수봉, 이 절벽을 마시암(馬嘶巖)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석전놀이가 있다. 박천읍의 석전은 신진 쪽 구진 쪽이 양편으로 갈라 행한다. 음력 정월보름날 신진 쪽의 읍민은 남산 쪽에, 구진 쪽의 읍민은 앞 벌판에 진을 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때 양편은 남자 장정과 청소년을 같은 숫자로 갈라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서 적진을 향해 돌을 던진다.

돌을 적진 멀리까지 날아가게 하는 도구로 ‘왕패’라는 것을 사용한다. 왕패는 노끈으로 엮은 띠 같은 것인데, 중간 부분을 좀 넓게 해 주먹만한 돌을 얹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왕패에 돌을 넣어 한 손으로 공중에 원을 그리며 돌리다가 한쪽 끈을 놓으면 원하는 곳으로 돌이 멀리 날아가 떨어진다.

이렇게 돌을 날리면서 적진에 점차 접근하고, 가까이 가면 맨손으로 돌을 던진다. 더 가까이 가면 육박전까지 벌인다. 양편 모두 돌에 맞아 유혈이 낭자하게 된다.

돌에 맞아 혹 중상을 입기도 하나 상대편을 원망하거나 고소하지 않는다. 석전은 평안남북도 어느 고을이나 음력 정월보름날 놀이로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공안(公安)상의 이유라는 명목으로 엄금한 뒤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산업·교통

박천군은 평안북도의 다른 군에 비해 경작지가 많다. 총경지면적 221.90㎢, 경지율 42.1%로, 이 중 논이 89.2㎢, 밭이 132.7㎢이다. 따라서 총경지면적의 40%는 논이고, 60%는 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옥수수·메밀·팥·수수 등이다.

부업으로는 누에치기·양봉 및 소·돼지·닭·오리 등의 가축사육이 활발하다. 광업으로 금·은·운모·흑연·동 등이 소량 채굴되는데, 그 중 청룡면 노전동 광산의 금운모(金雲母)와 용계면 고창동의 인상흑연(鱗狀黑鉛)은 질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내수공업으로 덕안면·서면의 삿자리공업, 박천읍의 말꼬리세공업[馬尾細工品]·의롱장식업(衣籠裝飾業), 용계면 원산동의 유기공업 등이 있는데, 특히 유기공업제품은 품질이 좋다.

상업활동은 주로 5일정기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1830년대에 군내장·진두장(津頭場)·양비애장(兩飛崖場) 등이 있었고,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902년에 진두장·양비애장이 5일장으로 열렸다.

주거래품은 쌀·콩·밀·보리·깨·개석잠풀[水蘇]·포목·솜 등의 곡물, 메기·조기·농어 등의 어류, 배·밤·대추·감·잣 등의 과일, 놋그릇·철기·나무그릇·옹기·사기그릇 등의 그릇, 꿀·담배·삿자리 및 돼지·닭·소 등의 가축을 포함해 매우 광범위하였다.

1926년 박천읍의 박천장, 청룡면의 광성장(光星場)은 2·7일에 열렸고, 박천읍 남호동의 구진장(舊津場), 가남면의 영미장(嶺美場)은 1·6일, 동남면의 맹중리장(孟中里場)은 3·8일에 열렸다. 이 중에서 박천장은 운맹도로(雲孟道路)가 개통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지자 평안북도의 북부지방 각 곳에서 모여들어 곡물·목재를 비롯한 임산물·포목·장롱·말꼬리제품·어물 등의 거래가 활발하였다.

따라서 정기시장으로는 도내에서 네 번째로 큰 시장이었으며, 해산물 거래물량으로는 선천시장 다음으로 두 번째를 차지하였다. 맹중리장은 미곡 및 약품 거래가 많았으며, 영미장은 곡물·비료·농기구·축산물·포목·해산물 등의 거래가 활발하였다. 광성시장은 농민을 상대로 하는 일용품 행상들이 주로 많이 찾는 시장이었다.

교통은 경의본선(京義本線) 철도가 군의 남부를 동서로 횡단하며 맹중리역·영미역 등이 군내에 있고, 맹중리역에서 분기되어 박천읍까지 가는 박천선이 있다. 도로는 안주·박천·정주를 잇는 경의국도가 동부와 중앙부를 가로지르며, 맹중리·박천읍·운산북진간의 맹북선(孟北線)이 동부를 지난다.

또 양가면 영미동에서 청룡면 광성동을 거쳐 태천과 대우동으로 가는 영태선(嶺泰線)이 군의 북부 중앙을 지난다. 수운으로 대령강을 이용해 박천읍 구진까지 어선이 드나들어 어시장을 연다.

읍·면

[박천읍 博川邑]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읍. 면적 91.99㎢, 인구 1만 7225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미력동이다. 본래 박천군 박천면과 북면 지역이었으나 1935년 행정구역 개편시 북면이 박천면에 편입되었고 1942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남쪽의 봉린산, 동북쪽의 두모산(頭帽山, 189m)을 중심으로 낮은 구릉이 있으나, 읍의 서부 경계를 따라 대령강이 흐르고 그 지류가 읍 전체를 망상으로 흘러 평야지대가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그 밖에 콩·조·옥수수 등의 잡곡과 목화를 재배한다.

임업으로 대령강 상류인 태천·삭주·장성 등지에서 벌채한 소나무를 우기(雨期)에 뗏목으로 박천까지 보내 건축재나 갱목으로 제재한다. 가내수공업으로는 의롱장식·잠철(潛鐵)·말꼬리제품을 생산한다.

박천선 철도가 서남부를 남북으로 지나며, 도로는 경의국도가 서남단을, 2등도로 맹북선과 3등도로 박태선 및 박천영변선이 읍의 중앙부를 지난다.

유적으로는 원남동에 아어서원, 어의동에 심곡사, 용흥동에 봉강사, 봉하동에 봉명사·지천사, 송덕동에 박천향교, 송덕동에 둘레가 약 2.2㎞인 박릉토성이 있고, 주필각에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몽진길에 박천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수록된 비석이 있다.

명승지로는 박천군청에서 약 1㎞ 떨어진 대령강변에 있는 영파정이 풍치가 좋기로 유명하며, 삼안동의 와룡산도 산책과 수렵의 적지로 알려져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1개, 국민학교 2개교가 있다. 미력(未力)·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남호(南湖)·봉상(鳳上)·봉하(鳳下)·병천(丙川)·송덕(松德)·등산(燈山)·삼안(三安)·추호(楸湖)·남하(南下)·사직(社稷)·원남(元南)·용흥(龍興) 등 17개 동이 있다.

[가산면 嘉山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4.12㎢, 인구 4,41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문동이다. 적유산맥의 여파로 산세가 험준하고 평야가 협소하며, 중앙의 봉두산을 중심으로 면의 대부분이 200m 내외의 구릉지대로 되어 있다.

서남쪽 경계에 장수탄강이 심한 곡류가 되어 남류하며, 그 연변과 동북부에 있는 삼가저수지를 중심으로 약간의 충적지가 있어 이 지역에서만 논농사를 지을 수 있다.

따라서 쌀 생산보다는 조·수수·옥수수·감자·콩·면화 등이 주로 생산되며, 부업으로 목탄·땔감·목재 및 삼베·명주의 생산과 소·닭·돼지의 사육이 이루어진다. 대성동과 신사동에서는 소량의 흑연과 금이 채광된다.

도로는 경의국도가 동서로 면의 중앙을 지나며, 영미에서 태천·대유동으로 가는 2등도로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난다. 유적으로는 동문동에 일명 봉두산성(鳳頭山城) 또는 내성이라고 하는 고려시대의 습홀성(濕忽城)이 있는데 석축 둘레가 약 299.3m이고, 성 안에 우물 99개와 못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봉두산에는 고려 문종 때 건립한 천황사(天皇寺)가 있고, 동문동에 가산향교와 정기를 배향했던 충렬사가 있다. 효성산에는 옛날에 성좌(星座)에 제사를 지냈다는 효성대(曉星臺)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동문(東文)·남신(南新)·대성(大成)·봉소(鳳巢)·봉서(鳳西)·신사(新沙)·용탄(龍灘) 등 7개 동이 있다.

[덕안면 德安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8.47㎢, 인구 1만 328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사동이다. 묘향산의 지맥이 면의 동북부에서 끝나 동북부에 약간의 구릉지대가 형성되어 있을 뿐 전 지역이 거의가 평야이다. 청천강이 면의 남부를, 대령강이 북부와 서부를 각각 면의 경계를 따라 흐르다가 서남단인 망우동에서 합류한다.

원래 두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장상도(長上島)는 마주 보이는 중국 황하의 영향으로 흙탕물이 퇴적해, 1940년에 완전히 망우동과 연륙하게 되어 이 일대 약 17.8㎢를 갈밭[蘆田]으로 만들었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이 곳에 약 8㎢의 농토를 개간하였다.

또한 대령강변의 서공·유초·구룡·가흥의 4개 동리도 갈밭지대였으나 1910년대에 북일동해창산(海滄山) 아래에서 가흥동에 이르는 一자형 둑을 구축해 2㎢의 불모지를 개간, 덕안북평야를 이루었다.

따라서 이 면은 박천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미곡 다산지이다. 쌀 이외에 약간의 잡곡을 생산하며 농가부업으로 소·돼지·닭 등을 사육한다. 공업은 주로 가내수공업으로, 청천강과 대령강변의 이생지(泥生地)에서 자생하는 갈대를 원료로 한 삿자리 제조가 활발하다.

북일동 상일리는 토질이 차진 흙이므로 토기구이를 하는 곳이 있다. 어업으로 조기·숭어·복·게 등을 어획한다. 철도나 큰 도로는 없으나 맹중역·영미역·신안주역이 각각 6㎞ 범위에 있어 편리하며, 북일동의 달배기나루와 구룡동의 구룡나루에서 영미도로와 동사동농석이포에서 신안주로 갈 수 있다.

유적으로는 고구려 살수대첩 직후 건립된 고성진(古城鎭)이 사륙동과 하칠동 사이의 대장산(大長山) 서남 기슭에 있었으나 현재는 성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동사(東四)·구룡(九龍)·하칠(下七)·이봉(二峰)·사륙(四六)·남오(南五)·동팔(東八)·망우(望隅)·북일(北一)·유초(柳草)·서공(西公)·가흥(加興) 등 12개 동이 있다.

[동남면 東南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86.21㎢, 인구 1만 559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맹중동이다. 본래 박천군 동면과 남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 면을 병합하면서 동남면으로 개칭하였다.

동북부는 낮은 구릉지대이며 북부에 봉린산이 있다. 청천강이 동남부 경계를 따라 흐르고 대령강이 서북부 경계를 따라 흘러 두 강의 유역에 평야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논농사가 활발하며, 그 밖에 콩·조·보리 등이 생산된다.

한편, 상업과 교통이 발달해, 특히 맹중동은 인근 평야지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집산지이며, 운산북진 및 창성대유동광산의 거점이다. 경의선 철도가 서남부를, 박천선이 서부를 각각 남북으로 지나며, 경의북도와 맹북선 2등도로가 서부를 남북으로 통과한다.

명승고적으로는 고려 문종 때 건립된 심원사가 당상동봉린산에 있다. 절의 본당 기둥은 싸리이고 대들보는 칠기라는 전설이 있으며, 단오 때 박천읍민들이 사흘 동안 씨름대회를 벌인 뒤 심원사를 찾아 불공을 올리고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다. 또한 도남동의 설한산(雪寒山)은 가뭄 때 기우제를 올리는 성역이 있는 명산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맹중(孟中)·동남(東南)·서송(西松)·동이(東二)·송봉(松峰)·상강(上講)·대양(大楊)·일원(一院)·당상(堂上)·도남(都南)·진석(眞石)·학등(鶴登)·석화(石花)·동하(東下)·남송(南松) 등 15개 동이 있다.

[서면 西面]

군의 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1.73㎢, 인구 6,06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담동이다. 본래 가산군 서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박천군에 편입되었다.

동북쪽 가산면과의 경계에 황학산이 있고 서쪽 정주군과의 경계에 칠악산이 있어, 이를 중심으로 100m 내외의 구릉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장수탄강이 면의 중앙을 북에서 동남방향으로 곡류를 이루며 흘러 대령강에 유입하고, 대령강이 동부와 남부의 경계를 따라 흘러, 강의 연변에 수리시설이 좋은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따라서 주요 농산물로 쌀이 생산되며, 부업으로는 소·돼지·닭 등의 사육과 누에치기가 이루어진다. 가내수공업으로 근장동에서는 삿자리 제조가 활발하다. 어업으로는 성산동 거무노리어장에서 조기·복·숭어의 어획이 많다.

경의선 철도가 면의 중앙을 통과해 영미역과 정주군운전역이 4㎞ 내외의 범위에 있으며, 경의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지나고, 송담동∼정주군 마산면간의 지방도로가 서북부를 지난다.

유적으로는 금계동에 육영서원, 황학산에 윤관장군을 모신 조양사가 있고, 명승지로는 금계동황학산에 금계사(金鷄寺)와 약산성의 물맛이 좋은 금계약수가 있으며, 칠악산에는 선혈사(善穴寺)와 백운암(白雲庵)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송담(松潭)·와현(瓦峴)·성산(聖山)·근장(芹場)·하양(河陽)·용진(龍津)·운포(雲浦)·금계(金鷄) 등 8개 동이 있다.

[양가면 兩嘉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63.31㎢, 인구 1만 627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영미동이다. 본래 가산군 가동면(嘉東面)·가남면(嘉南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가산군이 박천군에 병합되면서 박천군에 속하게 되었고 1935년에 두 면을 합해 양가면으로 개칭되었다.

북동부는 옥녀봉(玉女峯, 111m)을 중심으로 구릉지대를 이루고, 대령강이 남쪽 경계를 따라 서남류하며 그 지류가 면 전체에 망상으로 흘러 하천변에 평야지대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그 밖에 수수·조·콩 등의 잡곡이 생산된다. 정미업·비료업·농기구거래가 활발하다. 어업으로는 조기의 어획이 많기로 유명하다.

경의선 철도가 면의 남부를 동서로 관통하며 영미역이 있다. 또 경의국도가 면의 북부를 지나고, 영미·태천·대유동을 잇는 2등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한다. 심태동 유태(遊台)에는 어항이 있어 어선이 드나든다. 명승지로는 선사동의 서문약수(西文藥水)가 소화불량 및 모든 질병에 효험이 있다고 해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와 중등과정의 금석산농사학교가 있다. 영미(嶺美)·연지(蓮池)·구정(九井)·연담(蓮潭)·봉산(鳳山)·자하(紫霞)·덕달(德達)·선사(善士)·덕인(德仁)·심태(深台)·서동(瑞東)·어의(於義)·보석(寶石) 등 13개 동이 있다.

[용계면 龍溪面]

군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90.58㎢, 인구 6,86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룡동이다. 본래 가산군 서북면(西北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박천군에 속하면서 용계면으로 개칭되었다.

동남단의 목우산 이외에 높은 산은 없으나 300m 내외의 잔구성 산지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 산간지대이며, 평지는 드물다. 서남쪽에 장수탄강이 남류하면서 정주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산간지대이므로 주민의 대부분이 화전민생활을 한다.

주요 농산물은 조·옥수수·수수·콩·팥 등의 잡곡이며, 임산물로는 목탄과 황밤의 생산이 많다. 광업으로 고창동에 운모광이 있으며, 공업은 원산동의 유기공업이 발달해 ‘납천이유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도로는 정주 납청정에서 태천으로 통하는 3등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난다.

명승지로는 은봉동·하단동과 정주군 덕언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장수탄강을 막은 동인저수지(同仁貯水池)가 있다. 이 저수지는 둘레가 약 12㎞로 경치가 아름다운 산정호수이며, 박천군과 정주군 일대의 관개시설로도 이용된다.

하단동의 목우산은 산록에서 소를 많이 방목해 붙여진 이름이며, 정월대보름에 달 뜨는 위치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는 전설이 있는 명산이다. 목우산 서남쪽에는 갓모양의 갓바위가 있는 바위동산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오룡(五龍)·원산(元山)·하단(下端)·은봉(隱鳳)·삼광(三光)·인봉(仁峰)·고창(古倉) 등 7개 동이 있다.

[청룡면 靑龍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62.57㎢, 인구 9,74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응봉동이다. 본래 가산군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박천군에 병합되었다. 1935년 북면의 창신동·일화동·은룡동을 편입하였다.

동쪽에 원수봉(元帥峰, 160m), 남쪽에 청룡산, 중앙에 응봉산(鷹鳳山, 201m)·토함산(吐含山, 253m)이 있어 대부분이 산간지대로 되어 있지만 험준하지 않은 구릉성 산지이다. 계지천이 면의 북부를 서북에서 동남방향으로 흘러 인덕동에서 대령강과 합류하며, 대령강이 동쪽 경계를 따라 남류해 하천주변에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옥수수 등이며, 피·기장도 재배된다. 광업으로는 노전동과 운흥동 일대에 운모광이 있고, 위령동과 노전동에서 소량의 흑연이 채광된다. 경의선 철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지나며, 영미∼태천간의 2등도로가 서부를, 3등도로의 박태선이 동북부를 각각 남북으로 지난다.

명승고적으로는 만수동과 인덕동 사이에 원수봉이 있는데, 이 곳은 대령강에 접해 있어 경치가 뛰어나며 홍경래가 연병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라 하고, 대화동의 청룡사는 홍경래와 우군칙이 결연한 곳이라고 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교가 있다. 응봉(鷹峰)·위령(威靈)·노전(蘆田)·운흥(雲興)·봉지(鳳之)·광성(光星)·인덕(仁德)·만수(萬壽)·대화(大化)·장신(長新)·일화(一和)·은룡(隱龍) 등 12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평안북도 남부에 있는 군. 동쪽은 영변군, 서쪽은 운전군, 남쪽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평안남도 안주군과 문덕군, 북쪽은 태천군과 접해 있다. 동경 125°28′∼125°43′, 북위 39°35′∼39°49′에 위치하며, 인구는 10만 20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12월 군의 일부지역이 운전군으로 편입되었다. 1954년 10월에는 영변군 소림면 상추동·서위동 일부지역이 박천군에 넘어오고 박천군 보석리·동삼리·구련리·서삼리·봉덕리·삼봉리·청룡리·대연리·삼화리·북일리 등이 운전군에 넘어갔다. 1958년 6월에는 운전군에 넘어갔던 삼화리·삼봉리·청룡리가 다시 박천군에 편입되었다. 1980년 5월에는 용흥리·송도리와 덕성노동자구가 안주군에 속하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박천읍과 봉흥(鳳興)·봉성(鳳城)·중남(中南)·원남(元南)·상추(上秋)·덕삼(德三)·송석(松石)·석계(石溪)·기송(箕松)·상양(上楊)·맹중(孟中)·맹하(孟下)·대령(大寧)·율곡(栗谷)·청산(靑山)·단산(壇山)·신평(新坪)·청룡(靑龍)·삼봉(三峰)·삼화(三和) 등 1읍 20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박천읍이다.

이 군은 대체로 낮은 산지로 되어 있고, 청천강과 대령강 하류연안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산림은 군면적의 30%이며, 주요 수종은 소나무이다. 대령강 상류에는 댐이 건설되어 발전 및 농업용수로 활용된다.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는 중국의 건설 지원과 오스트리아 기술진의 참여로 건립되었으며, 서독을 비롯해 프랑스·일본 등에서 설비를 수입하였다. 나프타분해공장·에틸렌공장 등 7개의 계열공장을 보유한 북한 유일의 석유화학콤비나트를 이룬다. 1일 생산능력은 합성암모니아 800톤, 요소 1,200톤이다.

1987년 10월 10일에는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내에 안주아닐론방적공장이 설립되어, 아닐론을 원료로 연간 수천 톤의 아닐론솜을 뽑는다. 1988년 9월 7일에는 동 연합기업소 내에 청년수지마대공장을 설립했으며, 이로써 농민들이 가마니 짜는 작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89년 9월 8일에는 컨베이어시스템과 자동화 시설을 갖춘 탄산소다공장을 설립해 유리공업과 식료공업의 생산성을 높였다. 1992년 5월 3일에는 박천군 70리 수로공사가 완공되었다. 박천군 상양리봉린산(鳳麟山, 317m) 남쪽에 있는 박천심원사(博川深源寺)가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운전군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박천군지』(박천군지편찬위원회, 1969)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북한문화재 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북한의 관광자원』(한국관광공사, 1991)
『人物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북한의 산업』(대한무역진흥공사, 1995)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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