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동 ()

촌락
지명
1875년에 형성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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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75년에 형성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
명칭 유래

청나라의 영토에 속했을 때는 헤이딩즈[黑頂子]라고 불렸다. 한인들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신라(新羅)와 조선(朝鮮)에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서 ‘나선동’이라고 불렀다.

형성 및 변천

나선동은 지금의 나고르나야 데레브냐(Nagornaia Derevnia)에서 북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남쪽으로는함경북도 경흥(慶興)까지 20리이고, 서북쪽으로는함경북도 경원(慶源)과 100리 가량 떨어져 있으며, 북쪽은 중국의 훈춘(琿春)과 80리 정도의 거리이다. 동쪽은 연추영(延秋營)까지 70리, 지금의 포시예트(Posyet)인 목허우영(木許隅營)과는 90리, 주산관(珠山關)과는 30리 정도 떨어져 있다. 마을 앞쪽의 왼쪽은 물이 질퍽하게 괸 넓은 땅이고, 뒤쪽의 오른쪽은 육지로, 농토가 비옥하여 곡식이 잘 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은 1875년 음력 8월에러시아로 이주한 안형국(安炯國)과 김구삼(金求三) 등이 한인들을 모은 뒤 당국의 인가를 받아 만들었다. 당시에는지신허(地新墟, Tizinkhe)에서 30여 가구가 이주하여 살았지만,5~6년 뒤에는조선·러시아·중국 세 나라의 국경에 가까운 마을 가운데 상당한 규모로 발전하였다. 당시 마을의 규모는남북으로 10km, 동서로 12km 정도였다.

나선동은 1881년에 러시아와 청나라가 국경을 재조정하면서 청나라의 영토에 속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략 요충지인 이 마을을 청나라에 넘기지 않고 군인 1천명을 주둔시키면서 요새화하였다. 나선동은 270여 가구 2,600여 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는데, 러시아는 마을의 한인들에게 러시아 영토의 다른 곳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한인들이 청나라로 귀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마을을 없애고 주민을 몰아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인들은 집안의 살림살이도 챙기지 못한 채 마을을 떠나 흩어졌다. 이 때 일부는 조선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러시아 내륙 지방으로 옮겼다. 1884년에 내륙 지방으로 옮긴 한인들은 현재의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세니예프(Arsen’ev) 지역 아누치노(Anuchno)에서 도비허[都兵河, Daubikhe]라는 새로운 마을을 개척하였다. 그 뒤 1886년에 나선동은 훈춘 조약에 따라 청나라에 정식으로 반환되었다.

참고문헌

「나선동도」(김광훈·신선욱,『아국려지도(俄國輿地圖)』,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7)
『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하―재외동포사 총서8―(국사쳔찬위원회 편, 국사편찬위원회, 2008)
「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3(반병률,『신동아』8월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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