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미 (Адими)

촌락
지명
1872년에 러시아 포시예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
이칭
이칭
아지미, 상아디미, 하아디미
정의
1872년에 러시아 포시예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
명칭 유래

마을 이름은 현재 포이마(Пойма)강으로 불리는 아디미(Адими)강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아디미강은 18세기에 제작된 중국의 지리서에는 하치미[芽芝味]라고 표기되었는데,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러시아의 지도에는 아디미로 적혀 있으며, 1972년에 포이마강으로 바뀌어 불렸다. 한인들은 아디미를 ‘농평’으로 불러, 상(上)아디미를 상농평으로, 하(下)아디미를 하농평으로 각각 불렀다.

형성 및 변천

마을은 아디미강 양쪽 기슭에 자리하였다. 곧 아디미강의 하구에서 약 12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는 분지 지역으로, 폭은 약 2km이다. 이곳은 기름진 농경지가 많아서 여러 야채와 곡물을 재배하기에 알맞다. 강의 하구부터 약 4km 정도 강변을 따라 하아디미 마을이 들어섰고, 그곳에서 약 1.5km 정도 강변을 따라 올라간 곳에 상아디미 마을이 자리하였다. 하아디미 마을에는 한인 사회의 자치행정 조직인 도회소(都會所)와 함께 교회, 학교, 러시아 초소 등이 위치하여,두 마을 가운데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특히 1893년에 설치된 아디미의 도회소는 북도소(北都所)라고 불렸는데, 연해주 지역의 또 다른 대표적 한인 마을인 연추(煙秋)가 남도소(南都所)라고 불렸으므로, 아디미 마을은 연추 마을과 함께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었다.

아디미 마을은 1872년에 자리를 잡은 뒤, 1937년에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되기 전까지 꾸준히 발전하였다. 곧 1878년에는 주민이 46가구 176명이었는데, 1906~1907년 경에는 115가구 764명으로 늘어났으며, 1914년에는 800명 이상이 거주하였다. 특히 1907년에 러시아정교회 선교부가 이민족 선교를 강화하는 결정을 내리며 아디미 마을에 2천5백루블의 지원금을 할당하였을 때,아디미 마을의 한인들은 자발적으로 보탠 기부금을 포함하여 모두1만6천루블을 들여서 웅장한 교회 학교를 건립하고는 전담 선교사와 교사들을 통해서 교육 활동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당시 아디미 마을은 22개 마을을 총괄하는 지역 중심인 ‘읍(Область)’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 해 6월에 아디미 마을에독립운동단체인 한민회(韓民會)의 본부가 설립된 뒤, 휘하의 마을에도 지부가 개설되었다.

강제이주 조치 이후에 아디미는 러시아인 마을이 되었다. 1972년에는 이름도 변경되어 상아디미는 포이마(Пойма)로 바뀌었고, 하아디미는 로마슈카(Ромашка)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폐촌(廢村)으로 변해 있다.

참고문헌

『러시아-중앙아시아 이주한인의 역사』(이상근, 국학자료원, 2010)
『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편, 2009)
『러시아에서의 140년간』(박보리스·부가이 니콜라이 저, 김광한·이백용 옮김, 시대정신, 2004)
「러시아 한인의 발자취를 따라서」4(반병률,『신동아』9월호, 2004)
집필자
방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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