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회의 설립은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晉)이 주도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군수금 1만 루블과 함께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보내 의병 활동을 추진할 조직을 결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1908년 4월에 얀치헤〔Yanchihe, 煙秋〕에서는 최재형(崔在亨), 이범윤(李範允),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이 발기인으로 나서, 최재형의 집에서 수백명이 참여한 가운데 총회를 열고서 동의회를 결성하였다.
회장에는 이위종이 선임되었고, 최재형과 엄인섭은 각각 총재와 부회장을 맡았으며,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본부는 얀치헤에 두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지회(支會)를 설립하였다.
1908년 5월 10일자 『해조신문(海朝新聞)』에 의하면, 동의회는 교육에 의한 구국 정신의 함양과 실력 양성, 그리고 단체 조직에 의한 동포의 일심(一心) 동맹을 첫째 방침으로 삼아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의 뜻을 강조하였다. 특히 뜻을 함께하는 군사의 모집이나 군사들을 위해서 기증된 약 100정의 총, 그리고 최재형과 이위종, 수성 방면 동포들이 낸 약 3만 루블의 의병활동 기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동의회는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활동하였다.
1908년 여름에 동의회의 의병부대는 안중근을 우영장(右營將)으로 삼아 국내 침공 유격전을 벌여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동의회의 무장 투쟁을 문제 삼아 의병 활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이 때 조직 내부의 갈등이 겹쳐 동의회 활동은 위축되었고, 그 뒤 수청파를 중심으로 하는 일심회(一心會)로 개편되었다.
일심회는 상부상조를 강조하였지만, 무장투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1909년 2월 말에 얀치헤에서 안중근을 중심으로 한 일심회의 핵심 활동 그룹 12인은 손가락 하나씩을 끊고 동의단지동맹(同義斷指同盟)를 맺으면서 동의회와 같은 성격의 항일운동단체임을 결의하였다.
동의회는 1905년 이후에 러시아에서 활동하였던 항일 의병세력을 결집하면서, 1908년에는 국내에 들어와 유격전을 벌인 대표적인 구국운동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