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출생했다. 유년기에 연해주로 이주했다. 1900년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운동 때, 러시아군대에서 종군한 공로를 인정받아 러시아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고,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군 통역으로 근무했다. 1907년 안중근 등과 의형제를 맺고, 항일의병을 일으킬 목적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총기와 자금을 모았다. 1908년 외숙부인 최재형의 집에서 동의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1908년 국내 진공작전 시 좌영장을 맡아 공을 세웠다. 1909년에는 이범진, 이범윤의 사자인 김영선과 함께 한성에서 비밀리에 고종을 알현했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일본의 밀정으로 변절해, 1911년 무렵부터 일본측에 독립운동의 정보를 제공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대양보」의 활자 1만 5000개를 일본측의 지시에 의해 절취해 그 발행을 중단하게 했다. 1911년 6월초에는 독립운동가에 체포되었던 밀정 서영선을 탈출시키는 등 밀정을 탈출시키는데도 관여했다. 이와 동시에 1911년 조직된 권업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경찰부에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일 때는 이동휘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애국저금단과 북빈의용단에 관한 정보를 일본측에 제공했으며, 1917년 중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암살하고자 할 때도 정보를 일본측에 제공했다. 그러나 1920년 15만원사건 과정에서 일제의 밀정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1936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