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디미 (Sidimi)

촌락
지명
1867년에 러시아 포시예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
이칭
이칭
상시디미, 중시디미, 하시디미
정의
1867년에 러시아 포시예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세운 마을.
개설

19세기 중반 이래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이 주로 머물러 살았던 마을이다. 1914년 경에는450여 가구 2천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여, 주변의 아디미 마을과 함께포시예트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로 손꼽혔다.

명칭 유래

마을은 강변에 자리하였는데, 이 강은 중국의 지리서에 에치미, 이치미로 표기된 시지미(柴芝味)이다. 19세기 중반의 러시아 지도에는 니지미(Нижми), 시디미(Сидими), 세디미(Седими) 등으로 표시되었고, 1972년에 나르바(Нарва)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을의 이름은 대체로 시디미로 불리지만, 시지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자연환경

마을은 포시예트(Posyet) 지역 나르바 강변의 길이가 약 10㎞, 폭이 약 1~2㎞정도인 분지에 위치하였다. 농경지가 비옥하여 여러 곡물은 물론 야채를 재배하기에 알맞다. 특히 마을 사람들은 러시아 군영이 있던 바라바쉬(Барабаѡ, Barabash)나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Vladivostok)로 귀리 등의 곡물을 내다 팔아 경제적 부를 유지하였지만, 강물이 자주 범람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한인들은 1864년부터 시지미 강변에 정착하였다. 1867년 당시의 인구수는 11가구 54명이었고, 1878년에는 30가구 186명으로 늘었다. 특히 1880년대 중반에는 상·하 두 마을로 나뉠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고, 1900년경에는 두 마을 사이에 중시디미 마을이 형성되는 등 3개의 마을이 되었다. 그 뒤 1906년∼1907년에는 주변 지역을 포함하여 230가구 1200여 명의 한인이 살았는데, 1914년에 이르러서는450여 가구 2000명을 넘어, 포시예트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로 알려졌다. 상시디미 마을에는 러시아 초소와 함께 학교와 교회가 세워졌고, 1907년 6월에는주변의 아디미 마을에 설립된 한민회(韓民會) 지부를 통해 자치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의 권력 형태인 소비에트(soviet) 체제가 들어선 이후, 1923년에는 마을에도 소비에트가 설치되었다. 1929년에는 국영농장인 ‘시디미’가 자리하여 농업과 사슴 사육 등이 실시되었다. 그 뒤 1937년에 한인들이 강제 이주되면서, 러시아인 마을로 바뀐 뒤 목축 농장으로 변화하였고,주변에는 선박수리소가 들어섰다. 1972년에 마을 이름은 베즈베르호보(Безверхово, Bezverkhovo)로 바뀌었다.

현황

현재 폐촌으로 변하여 러시아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마을 주변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운영하였던 농장이나 선박수리소도 없어졌다. 다만 네벨스크(Невельской, Nevelskoi) 국립해양대학 휴양소와 아그로하산(Агрохасан)이 운영하는 사슴 농장이 있다.

참고문헌

『러시아에서의 140년간』(박보리스·부가이 니콜라이 지음, 김광한·이백용 옮김, 시대정신, 2004)
「러시아 한인의 발자취를 따라서」4(반병률,『신동아』9월호, 2004)
집필자
방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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