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원(水原). 호는 운암(雲庵). 충청북도 중원 출신.
일찍이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안동진위대 부위를 지냈다. 1907년 한국군이 강제해산당하자 경상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00명을 거느리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때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鳳復寺)에서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을 만난 뒤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이 되었다. 그 해 7월 제천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도선봉장(都先鋒將)이 되었고, 8월에는 모두령(毛頭嶺)·유수산, 문경의 갈평 등지에서 크게 승전하였다.
9월에는 영월 사리치(寺里峙)에서 선유원(宣諭員) 홍우석(洪祐錫)의 100여 명의 수비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1908년 6월 이강년이 적에게 붙잡히자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김상태(金尙台)로부터 의병 1지대를 분급받아 서벽·내성·아산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2월 죽산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1918년 상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잡혀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