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자 ()

의생활
인물
20세기 중 · 후반에 활동한 한국의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11년 7월 11일
사망 연도
2010년 4월 25일
출생지
함경남도 안변
주요 저서
『최경자 자전연감 패션 50년』|『패션과 함께한 나의 사랑』|『날개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머니』|『최경자와 함께한 패션 70년』
주요 작품
「「고려자기」 이브닝 드레스 드로잉」(1962, 이세득 화백 작품)
주요 경력
제1세대 한국패션디자이너|1955년 대한복식연우회 초대회장 역임|1961년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 초대회장 역임|국제복장학원 원장 역임|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 이사장
대표 상훈
한국잡지문화상(문화공보부 장관상, 1975년 11월)|대한민국산업훈장(1985년 11월)|제2회 모범여성 경영인상(국무총리상, 198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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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최경자는 20세기 중 · 후반에 활동한 한국의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이다. 1937년 함흥의 은좌옥에서 양장을 시작한 최경자는 1948년 서울에 국제 양재 학원을 열었고, 6·25 한국전쟁 중에는 대구에서 활동하며 국제 양장사와 최경자 복식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1954년 명동에 입성해 국제 양장사를 정착시킨 최경자는 한국 패션 디자인 산업과 패션 교육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정의
20세기 중 · 후반에 활동한 한국의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
인적 사항

최경자는 1911년 7월 11일 함경남도 안변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 3월 원산 루씨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3월 동경 국립무사시노음악학교 사범과를 수료한 후, 1936년 3월 동경 오자노미쓰 양장 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37년 함흥에 3남매의 멀티숍인 ‘은좌옥’을 열어 양장점 패션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요 활동

함흥에서 서울로 거점을 옮긴 최경자는 1948년 아현동에 국제 양재 학원을 열었다. 또한, 한국전쟁 중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에서 활동하며 국제 양장사와 최경자 복식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패션 입문기’인 1937년부터 1953년까지 양장점 오너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1954년 12월 대구에서 명동으로 국제 양장사를 이전한 후, 1957년 첫 번째 디자이너 단독 패션쇼를 열었고, 이후 대한 복식 연우회 회원들과 그룹 바자회를 기획하여 디자이너들의 공공 이익을 위해 힘쓰고, 한국 패션 시스템과 후학 양성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인 ‘패션디자이너 연합체 활동기’에 기존 국제 양재 학원을 1961년에 국제복장학원으로 재설립하였고, 같은 해 (사단법인) 대한 복식 디자이너 협회(KFDA)의 회장이 되었다. 또한, 1963년 전문 패션 모델 양성 과정인 ‘국제 차밍 스쿨’을 개설하며 패션 산업과 교육 시스템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6부터 1979년까지인 ‘디자이너 패션 브랜드의 산업화 구축기’에 우리 섬유를 해외에 알리기 위해 KOTRA, 패션 산업계와 협력하여 국내 및 해외 패션쇼를 개최하였고, 1960년대 미도파 백화점 기성복 매장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아들 신현장을 필두로 1975년 데님 전문 패션 기업인 ㈜와라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캐주얼 진 제품을 생산하였다.

1980년부터 2008년까지인 ‘교육 사업 집중기’에 1980년에 설립된 (재단법인) 국제 패션 디자인 연구원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자신의 활동을 취합하여 정리하게 되었다.

1950년대 3회의 개인 작품 발표회를 개최하며 패션디자이너로 도약하였다. 첫 번째 복장 작품전을 1957년 10월 12일 오후 3시 반도 호텔에서, 두 번째 복장 작품전은 1958년 10월 4일 오후 3시 반도 호텔에서 열었다.

1960년대에는 개인 발표회 개최와 더불어 국제 패션계와의 교류 발표회, 국제 복장 학원 연구생 발표회, 국내 복지 회사들과의 협업 발표회에 참여하였다. 또한, 1964년 10월 대한 복식 디자이너 협회 회원들과 3개월간 미국과 프랑스를 방문하여 기성복 제조 과정 및 시설을 시찰한 후, 기성복 시대의 도래를 인식하고 이 시스템을 국내에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더불어, 최경자는 양장점 오픈 시점부터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고, 1960년대에 일본 문화 복장 학원, 미국 FIT(The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와 교류하여 해외 패션 교육 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하였다.

1970년대 최경자는 디자이너들과 함께 한국 섬유 및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의 수출 증진을 위해 KOTRA와 협력하며 대한잠사협회, 한국 나일론, 면직물 협회 주관의 그룹 협업 패션쇼에 1960년대에 이어 참여하였다. 또한, 백화점 중심의 유통 구조 개편에 발맞추어 백화점 패션쇼에 진출하고, 이와 더불어 한국의 현대 패션과 전통 문화를 알리기 위한 문화 패션쇼에도 참가하였다.

상훈과 추모

최경자는 1975년 11월 ‘한국잡지문화상’, 1985년 11월 ‘대한민국산업훈장’, 1989년 11월 ‘제2회 모범여성 경영인상’ 등을 수상하였다.

일본의 양재 시스템과 미국의 기성복 시스템 그리고 프랑스 디자이너들의 트렌드를 명동 양장점 디자이너들과 함께 한국 패션계에 전파한 최경자는 디자이너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활동한, 제1세대 한국 패션디자이너로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일본 양재 교육 시스템과 미국 패션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고 교육 사업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여, 한국 패션 산업과 패션 교육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최경자, 『최경자 자전 연감 패션 50년』(의상사 출판국, 1981)
최경자, 『패션과 함께한 나의 사랑』(국제 패션 문화사, 1990)
최경자, 『날개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머니』(명진출판사, 1996)
최경자, 『최경자와 함께한 패션 70년』(재단법인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 1999)
이재정·박신미, 『패션, 문화를 말하다: 패션으로 20세기 문화 읽기』(예경, 2011)

논문

박신미, 「제1세대 한국 패션디자이너 최경자 고찰: 매체 분석을 통해 밝혀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활동을 중심으로」(『복식』 69-3, 한국복식학회, 2019)
박신미, 「제1세대 한국 패션디자이너 최경자와 노라노 비교 고찰: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디자인 특성 및 행보를 중심으로」(『복식』 70-1, 한국복식학회, 2020)

기타 자료

‘최경자 패션쇼, 미순회 앞서 45점 내놔’(『동아일보』 1973.09.27.)
‘『실크패션쇼』 개최, 내(來)19일 일본 등지서’(『매일경제』 1970.04.27.)
‘최경자복장작품전’(『동아일보』 1958.10.03.)
‘최경자 팻숀 · 쑈’(『경향신문』 1958.10.01.)
‘최경자복장작품전’(『경향신문』 195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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