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이전, 서울 종로와 광교 등지에서 영업하던 양장점들은 1950년대 명동으로 이전하였다. 1954년에 문을 연 미도파백화점(현 명동 롯데백화점 영프라자) 앞 전차가 다니던 길을 건너 명동 초입부터 (구) 수도극장에 이르는 길, 그리고 충무로 태극당까지의 거리는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의 유일한 산책로이자 양장점과 미용실이 밀집한 스타일의 거리였다. ‘○○양장점’이라는 상호를 내걸던 1950년대 양장점의 풍경은 변두리 한복점과 다르지 않으며, 매장 안은 재봉틀과 재단대가 놓여있고 옷감은 벽에 걸려 있었다.
이 시기 명동 중앙 거리 양쪽으로 ‘한양장점’, ‘송옥양장점’과 함께 ‘엘레제양장점’, ‘키티양장점’, ‘루크양장점’, ‘파리양장점’, ‘노블양장점’ 등 외래어 이름의 양장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후 명동은 20세기 한국 패션의 중심지가 되었다. 양장점 디자이너들은 개별 고객을 위해 특별 맞춤을 하거나 샘플 디자인을 만들어 놓고 고객이 선택한 원단으로 제품을 제작하였으며, 디자인의 가격은 원단 가격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다.
명동의 양장점은 양장점 주인인 디자이너를 주축으로 재단사, 재봉사, 종업원 그리고 심부름을 하며 기술을 배우는 견습생을 포함한 10명 정도의 직원이 있고 이들은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근무하였다. 디자이너들은 고정 고객을 제외하고는 직접 고객을 맞이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 여성 매니저가 일반 고객을 관리하였다. 매니저는 기본 급여에 수주 능력에 따라 수당을 받고, 실력 있는 매니저는 재단사와 같이 경쟁 양장점에 스카우트되기도 하였다. 명동양장점의 고객은 미8군의 가수, 배우, 외교관 부인, 군인 장교 부인과 같은 상류층 부인들과 그 자녀들이다. 또한, 양장점들은 여성복뿐만 아니라 아동복 맞춤도 함께 진행하며, 양장점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다양한 고객층의 수용으로 인해 ‘예쁘다양장점’과 같이 성인 옷을 디자인하다가 이후 아동복으로 유명해진 경우도 있었다.
1950년대 명동에서 활동한 대표 양장점과 디자이너는 ‘한양장점’의 한동식, ‘송옥양장점’의 오송죽과 심명언, ‘국제양장사’의 최경자, ‘아리사양장점’의 서수연, ‘노라노의 집’의 노라노, ‘살롱 드 모드’의 이종천, ‘마드모아젤’의 김경희, ‘라 · 모오드양장점’의 최금린, ‘크로오버양장점’의 문신덕, ‘이성우양장점’의 이성우, ‘붜그양장점’의 윤현경, ‘우리양장점’의 홍명애 등이었다. 또한, ‘청실양장점’처럼 디자이너를 내세우지 않은 양장점도 있었다.
6.25 한국전쟁 이후 가장 먼저 명동에 자리 잡은 ‘한양장점’의 한동식은 완성도 높은 클래식한 스타일과 더불어 TPO(Time, Place, Occasion)를 고려한 디자인을 제안하였고, 대규모 매장을 운영한 ‘송옥양장점’의 오송죽과 심명언은 직원들의 유급 휴가, 교통비 및 식대 지급 등으로 직원 복지 시스템을 제공하였다. ‘아리사양장점’의 서수연은 간결한 재단이 돋보이는 디자인을 선보였으며 ‘국제양장사’의 최경자, ‘노라노의 집’의 노라노와 함께 1950년대 중 · 후반 패션 트렌드를 이끌었다. 또한, 디자이너들의 멘토로 평가받는 ‘살롱 드 모드’의 이종천은 탁월한 컬렉션드로잉과 트렌드 분석으로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반면, ‘마드모아젤’의 김경희는 1958년 S/S 시즌까지는 프랑스 디자이너 작품의 표절로 혹평을 받았으나, 라이프스타일의 개념을 디자인에 적용하고 선이 아름다운 디자인을 선보이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라 · 모오드양장점’의 최금린은 1959년 12월 ‘국제양장사’ 최경자의 작품과 함께 실린 『여원(女苑)』 화보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과감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디자인에 담아냈다. 이외에 ‘붜그양장점’의 윤현경은 중년 부인을 위한 스타일을, ‘우리양장점’의 홍명애는 허리선이 강조된 여대생을 위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또한, ‘크로오버양장점’의 문신덕, ‘이성우양장점’의 이성우, ‘청실양장점’은 보편적 스타일의 외출복, 남성복, 칼리지 룩 스타일을 제안하였다.
6 · 25 한국전쟁 전후로 명동에 자리 잡은 양장점 디자이너들은 전쟁 이전 서구 양장 스타일을 단순 제작하는 양장점 형태에 머물러 있던 한국 패션을 ‘디자이너 패션의 시대’로 전환하였다. 또한, 제1세대 한국 패션디자이너들의 양장점이 정착한 명동 거리는 1950년대 이후 20세기 중 · 후반 한국 패션의 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