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

명동 거리
명동 거리
인문지리
지명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행정동(行政洞).
내용 요약

명동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행정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남부 명례방(明禮坊)에 속한 곳으로 명례방골 또는 종현(鍾峴)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상업지구로 변모하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번화가가 되었다. 6·25전쟁 이후 국립극장과 명동성당 등 근대건축물이 산재하고 문인들이 모이면서 음악·미술·문학·사진·연극 등 문화와 예술의 무대가 되었다. 1970년대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소비문화의 중심지, 유흥의 거리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강남 개발과 함께 영동·반포·여의도 등 부도심의 성장으로 상당히 위축되었다.

정의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행정동(行政洞).
개설

서울의 대표적 상업지구로 도 · 소매업과 금융업 등 서비스 산업의 밀집지역이다. 저동 1가 · 충무로 1 · 2가 · 명동 1 · 2가 · 남산동1 · 2가 · 3가 · 예장동 등 법정동 9개 동으로 구성되었다. 면적은 0.99㎢ 이며, 인구는 2,981명(2020)이다. 문화재로는 명동성당(사적 258)이 있다.

명칭 유래

조선시대 한성부 5부 49방 중 남부(南部)의 명례방(明禮坊)에 속하였으며, 명례방골 또는 종현(鍾峴)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명동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명치정 1 · 2정목(明治町一 · 二丁目)이 되었고, 1946년에 명동1가 · 명동2가로, 1955년에 이를 합하여 명동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주택지로 밀집을 이루었고, 일제강점기 때 충무로 일대를 상업지구로 개발하면서 명동도 점차 상업지구로 변모하게 되었다. 1923년 이후부터 명동은 서울의 번화가가 되었고, 그후 광복6 · 25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여전히 서울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광복의 환희, 전후의 허무와 주1가 흐르던 이 거리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인들은 명동거리의 다방과 술집 등에 모여 예술과 인생을 논하며 불운하였던 시대의 한과 정을 풀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6 · 25전쟁 직후 정부가 전후복구재건을 위한 토지계획정리추가지구로 결정한 이후부터이다. 1956년 이후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고급양잠점, 양화점, 귀금속, 대형 백화점, 각종 사무실, 금융기관의 본사, 쇼핑센터 및 소매전문점들이 밀집되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쇼핑 관광지로 애용되어 왔다.

당시에 국립극장과 명동성당 · 중국대사관 · 중앙우체국 등 근대건축물과 공공기관이 산재해 있었고 문인들의 집합소였던 여러 다방들은 음악 · 미술 · 문학 · 사진 · 연극 등 문화와 예술의 무대였다. 그 후 이곳은 점차적으로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소비문화의 중심지, 유흥의 거리로 바뀌어 갔다.

1970년대까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였으며, 1976년에 3 · 1고가로의 건설로 저동 1가에서 충무로 2가에 이르는 도로가 5m에서 15m로 크게 확장되면서 현재와 같은 도시형태를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강남 개발과 함께 영동 · 반포 · 여의도 등 부도심의 성장으로 금융기관이 여의도로 이전해 가고 대형백화점과 상가 등이 새로이 조성됨에 따라 명동의 상권과 중심성은 상당히 위축되어 갔다. 특히 압구정동 일대가 새로운 패션 중심지로 등장함에 따라 최신 유행의 산실이라는 명동의 기능은 점차 퇴색되어 갔다.

현황

탈근대 사회로 전환되고 있는 오늘날, 장소가 가진 문화와 전통을 장소의 '정체성'으로 인식하여 지역개발의 주된 요소로 활용하고자 하는 추세 속에서 이 지역의 전통과 역사성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서울시는 핵심 추진 프로젝트로서 도심재창조사업을 계획하고 명동을 관광특구로 지정하여 인사동~삼각동~명동을 잇는 첨단 문화관광거리를 조성하여 이 축을 관광 · 쇼핑 · 문화의 국제적 명소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문화관광부는 명동이 근대 이후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구 국립극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구 국립극장의 건물을 정부에서 매입 · 복원하여 상실된 명동 문화의 맥을 이어감은 물론, 이 건물의 가치를 보존하여 수준 높은 공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현대의 문화인프라로 적극 활용하기로 하였다. 구 국립극장 건물은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어 1934년에 처음 개관한 '명치좌(明治座)'로, 문화예술사적 ·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큰 이 건물은 2009년 '명동예술극장'으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급조된 것이 아닌 시간을 통해서 형성된 역사의 누층이 이 지역의 문화적 자본으로 인식되면서, 명동은 다시금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문화와 쇼핑의 매력 명소로 부활하였다.

참고문헌

『일제강점기 도시계획 연구』 (손정목, 일지사, 1990)
『서울 육백년사』 3·4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3)
『서울특별시동명연혁고』Ⅱ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8)
서울특별시(www.seoul.go.kr)
주석
주1

‘고통’, ‘깊은 감정’을 뜻하는 말로 ‘슬픈 감정’을 이르는 말.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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