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점은 양복을 만들거나 파는 가게, 즉 양복의 제작소 또는 판매점이다. 따라서 근대 시기에 양복점은 때로는 양복상(洋服商)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오늘날 양복점은 일반적으로 남성복 정장을 전문으로 제작 또는 판매하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근대 시기의 양복점은 남성복 정장뿐만 아니라 교복, 여성복, 아동복까지 제작하거나 판매하는 곳이었다.
한국 최초의 양복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1884년 인천의 일본인 양복점 스에나마, 1889년 서울 광화문 우체국 옆에 설립되었다는 하마다[濱田] 양복점 등이 최초의 양복점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두 곳 모두 사료로 입증되고 있지는 있다.
19세기 말 신문 광고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양복점은 『독립신문』 1896년 4월 16일에 등장하는 ‘쥬식회사’이다. 광청교 북천변에 위치한 이 회사는 내부, 군부, 경무청에서 필요로 하는 갓, 신, 옷을 판매하는 회사였다. 비록 양복을 판매한다고 하지는 않았으나, 『독립신문』 1896년 9월 10일에 등장하는 쥬식회사(Jusik Company)의 국 · 영문 광고문에서 갓은 hats, 신은 foreign shoes, 옷은 foreign clothes로 기록되어 이 회사가 판매한 옷이 양복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쥬식회사는 일류 테일러(first-class tailors)와 구두 제작자(shoemakers)를 보유하고 있었던 최초의 한국인 양복점이었다.
1890년대는 근대 양복점의 태동기로서, 쥬식회사 이외에 리키타케(Rikitake) 양복점, 위엔타이[源泰] 양복점 등 외국인이 경영하는 양복점도 존재하였다. 1890년대 양복점에서는 정부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서구식 예복, 군복, 경찰복을 비롯하여 각 계절에 적합한 일반 양복과 넥타이, 셔츠 등의 부속 상품을 제작, 판매하였다.
1900~1910년대에는 양복점의 수가 이전 시기보다 많아졌으며 외국인 양복점과 한국인 양복점이 공존하였다. 당시 양복점에서는 대례복이나 군복과 같은 정부 관복의 제작 납품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신사복, 외투, 학생복 등이 제작, 판매되었다. 또한 신사복, 외투와 같은 일반 양복의 경우에는 주문복뿐만 아니라 기성복 판매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부인 양복 판매도 조금씩 행해지고 있었다.
1920년대는 양복점의 호황기로서, 서울 소재 양복점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1924년 중국인 양복점 수는 14개, 1926년 한국인 양복점 수는 70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당시 양복점에서 제작 판매된 물품은 신사복과 외투 등의 일반 양복 위주였으나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품 유형이 존재했으며 한 유형 내에서도 세부 상품이 많고 디자인과 소재에 따라 다양한 가격대의 상품들이 판매되었다. 양복점의 호황은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 이전까지 이어졌다. 1930년대에는 지방에도 ‘부인 양복점’이 생겨나는 등 부인복 전용의 맞춤 양복점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1938년 이후, 1945년 광복 이전까지는 전시 비상 경제 체제 하에서 양복점의 정상적 영업이 어려웠다. 소비자의 불안 심리로 인해 일시적 호황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양복점들은 수선일로 전환하거나 판매를 하더라도 일반 양복보다는 관청 관리복, 국방복, 학생복, 작업복 등의 판매에 집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