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면은 1924년에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우곡(又麯)이다. 그는 백세주로 약주 시장을 개척하고 누룩과 술 연구에 매진했던 사업가로서 평생 양조인의 외길 인생을 살았다. 양조 면허가 제한되어 있던 시절에 양조를 위해서 포항, 순천, 강릉, 포천, 수원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그의 유업을 이어받아, 백세주를 만드는 국순당은 큰아들 배중호가, 프리미엄 막걸리 부자를 만드는 배혜정도가는 딸 배혜정이, 산사춘과 느린마을막걸리를 만드는 배상면주가는 작은아들 배영호가 운영하면서, 한국 현대 양조사에서 인상적인 양조 가문의 길을 열었다.
배상면은 1950년에 대구농업전문학교(경북대학교의 전신) 농예화학과를 다닐 무렵, 교수가 만든 젖산을 양조업을 하는 삼촌에게 소개해주면서 술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52년 29세에 대구에서 기린양조장을 차렸다. 10년 동안 기린소주, 이화약주, 합성매실주, 리큐어 등 여러 종류의 술을 빚었지만, 실패를 맛보아야 하였다. 1963년에는 포항 대송양조장을 인수하여 막걸리를 생산했고, 1965년에는 누룩에 관심을 두고 조효소제를 개발하였다. 1967년부터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누룩 공장을 운영하면서, 한국미생물공업연구소를 차렸다. 1982년에는 생쌀 발효법에 의한 전통술 제조 특허를 취득하였고, 이듬해 국순당의 전신인 배한산업을 창립하였다. 배한산업에서 발효제를 만들어 주정회사에 납품하면서 사업 기반을 다졌고, 이 특허로 훗날 백세주를 개발하게 된다.
양조인 배상면의 필생의 역작은 백세주다. 배상면은 배한산업에서 직접 개발한 거미줄곰팡이 효소를 사용하여 생쌀 발효 기법으로 약주 백세주를 개발하였다. 새로운 발효제로 신상품을 낸 것도 특별하지만, 백세주의 성장을 통해서 잠자고 있던 약주 시장을 깨운 것도 큰 업적이다. 백세주는 한국 약주의 여명기에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면서 성장하였고, 인삼주, 오가피주 등의 대중적인 약주들이 뒤따라 생겨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배상면은 새로운 발효제와 새로운 술을 개발하면서도, 불합리한 주류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국회 청원, 헌법 소원 등을 마다지 않았다. 그의 노력이 주효하여 1994년에는 약주, 1995년에는 살균 탁주, 2001년에는 탁주의 공급 구역 제한이 폐지되면서 시군이나 도를 벗어나 전국 시판이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양조장들이 무한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지만, 탁주와 약주의 품질 경쟁과 제품 다변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배상면은 한국 양조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양조 기술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작업을 했다. 배상면은 양조장을 대상으로 발효제를 판매하는 사업을 했기 때문에, 사업 확장을 위해서는 양조 교육과 기술 보급이 동반되어야 했다. 폐쇄적인 한국 양조 산업에 한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했다. 1975년부터 탁약주 기술 전문지 『태양통신』을 발간하였고, 만년에는 서울 양재동에 배상면전통주연구소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공을 들였다.
배상면은 『전통주 제조기술』, 『먹을 수 있는 것은 술이 된다』, 『과실 및 약용식물을 이용한 가양주 만들기』 등의 저서를 펴냈고, 일본의 술 기술을 연구하면서 『조선주조사』, 『일본청주제조기술』, 『본격소주제조기술』 들을 편역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