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포(利浦 혹은 梨浦)는 현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에 위치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수조처(收租處)'로서 충청도의 죽산(1434년 이후에는 청안), 진천 등 2개 고을의 조세곡(租稅穀)을 수납하여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조창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창의 기능은 1470년(성종 1)에 충주 가흥창(可興倉)으로 흡수되었다.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조운과 조창은 큰 타격을 입었다.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지방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으면서 여말선초의 시기부터 조운과 조창이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조세 수납을 하는 곳으로서 조창과 함께 '수조처'라는 곳을 기록하고 있다.
조창과 수조처의 차이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실상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 곳이므로, 수조처 역시 조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충청도 지역의 경우, 조창은 1곳도 기록하지 않고 수조처만 8곳을 기록하고 있다. 8곳 중 3곳은 아산만 지역에 위치하고, 이포 등 5곳은 남한강 수계(水系)에 위치한다. 그런데 남한강 수계의 수조처 5곳 중에 이포와 우음안포(亐音安浦), 추호포(推乎浦), 등 3곳은 충청도가 아니라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포의 조창은 충청도 죽산(1434년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됨)과 진천 2곳의 조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이포가 경기도 천녕(川寧) 관아의 동쪽 5리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나와 있다. 천녕은 1469년(예종 1)에 여주에 병합되었다. 그리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포진(梨浦津), 즉 이포가 천녕 대신 여주 관아의 서쪽 43리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동일한 곳이다.
이포창(梨浦倉)은 1470년(성종 1)에 폐지되었다. 이포창과 우만창(宇萬倉, 우음안포의 조창)의 기능은 1465년(세조 11)에 신설된 충주 가흥창에 통합되었다. 조창의 숫자를 줄이고 세곡 수납을 감독하는 관리의 파견을 줄이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당시 이포창에서 세곡을 수납하였던 고을은 청안과 진천이었다. 그러나 원래 청안의 세곡은 추호포에서 수납하였고, 이포창에서는 죽산과 진천의 세곡을 수납하였다. 1434년(세종 16)에 죽산이 경기도로 편입된 후부터 이포창에서 죽산 대신 청안의 세곡을 수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1470년 이후 이포는 조창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포구로서 기능만을 유지하였다.
조선 초기에 운영된 이포의 조창은 충청도 죽산(이후에는 청안)과 진천 2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규모 조창이었다. 우음안포 및 추호포의 조창과 함께 이포의 조창은 남한강 수계의 대표 조창인 충주의 덕흥창(德興倉)과 경원창(慶源倉)의 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해 운영되었다. 하지만 조창 업무를 감독할 임시 관원의 왕래 등으로 인하여 여러 번거로운 일들이 발생하고 충주에 가흥창이 새로이 설치되자, 1470년에 이포의 조창 기능은 가흥창에 흡수되었다. 대체로 15세기 중반과 후반에 이르면, 조선 초기부터 운영되었던 이포와 같은 소규모 수조처는 폐지되거나, 아니면 많은 고을의 조세곡을 수납하는 조창으로 발전하는 두 가지의 방향으로 변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