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강서면(江西面) 덕흥리(德興里)에서 태어났다. 강서군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6일 강서군 함종면(咸從面)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차명건(車明鍵) 등이 주도하였으며, 함종공립보통학교 앞 광장에서 약 2천 명의 군중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김성심은 이로 인해 같은 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6월경 평양을 중심으로 기독교 장로파와 감리파의 부인 신도들이 각자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장로파 애국부인회는 한영신(韓永信)의 발기로 결성되었으며, 감리파 애국부인회는 박승일, 이성실, 손진실, 최신덕 등이 논의하여 결성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평안남도 출신의 김정목(金貞穆), 김순일(金淳一) 등을 평양으로 파견하여 여성 단체들과 접촉하고 지원을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이들은 1919년 8월경부터 통합을 권유하였는데, 두 단체의 간부들이 모여 논의한 끝에 11월에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로 연합이 이루어졌다.
대한애국부인회는 평양에 본부를 두고, 주요 지방에 총 8개의 지회를 둔 비밀결사였다. 재무부, 교통부, 적십자부 등의 부서를 두었으며, 회원 100여 명이 활동하였다. 연합회는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 증산지회(甑山支會) 지회장 송성겸이 군자금을 운반하던 중 붙잡혀 조직이 일제에게 발각되었다.
김성심은 당시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대한애국부인회 강서군 감리파지회의 모집원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에 붙잡혔다. 1921년 2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12월 13일 풀려났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