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신은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 부회장 등을 맡은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경기도 인천부에서 태어났으며, 14세 때 평안북도 의주로 이주하였다. 30세 때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 1919년 6월 기독교계 장로교파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타 교파의 애국부인회와 통합해 대한애국부인회가 조직되자 부회장을 맡았으며, 군자금을 모금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외,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경기도 인천부(仁川府) 출신이며, 1887년 7월 22일 한정학과 김경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영신(韓英信)이다.
14세 때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의주(義州)로 이주하였다. 21세에 기독교에 입문하고 의주 양실여학교(養實女學校)에 진학하였으며, 졸업 후 양실소학교(養實小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30세 때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6월 김용복(金用福) 등과 함께 평양에서 기독교계 장로교파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 활동을 돕고, 노파로 변장해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유를 받아 평양 내 타 교파의 애국부인회와 통합해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하였다. 한영신은 이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서북 지역 일대를 중심으로 부인회 조직을 확장하는 한편, 2,000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20년 10월 대한애국부인회 증산지회(甑山支會) 지회장 송성겸(宋聖謙)이 군자금을 운반하다 체포되어 조직이 발각되었고, 한영신도 그해 11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12월 평양지방법원 진남포지청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으나, 1921년 2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38세 되던 해에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수학하였으며, 졸업 후 15년간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임되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장로교 평안북도노회는 신사 참배를 결의하였으나, 한영신은 여전도회 임원으로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다. 해방 이후 월남하였고, 1948~1949년 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9년 2월 20일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