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풍산면(豊山面) 용문리(龍文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평양의 사립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 교사였다. 이 학교는 장로교 계통의 학교로, 3·1운동 때 태극기를 제작한 곳이었다.
1919년 6월경 평양을 중심으로 기독교 장로파와 감리파의 부인 신도들이 각자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장로파 애국부인회는 한영신(韓永信)의 발기로 결성되었으며, 감리파 애국부인회는 박승일, 이성실, 손진실, 최신덕 등이 논의하여 결성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평안남도 출신인 김정목(金貞穆), 김순일(金淳一) 등을 평양으로 파견하여 여성단체들과 접촉하고 지원을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이들은 1919년 8월경부터 통합을 권유하였는데, 두 단체의 간부들이 모여 논의한 끝에 11월에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로 연합이 이루어졌다.
대한애국부인회는 평양에 본부를 두고 주요 지방에 총 8개의 지회를 둔 비밀결사였다. 재무부, 교통부, 적십자부 등의 부서를 두었으며, 회원은 100여 명이었다. 연합회는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 증산지회(甑山支會) 지회장 송성겸이 군자금을 운반하다가 붙잡히면서 조직이 일제에 발각되었다.
김용복은 당시 장로파 부인 신도들과 함께 애국부인회 결성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애국부인회로 연합할 때도 참여하였다. 이후 평양 장로파 지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혔고, 1921년 2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