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신천면(信川面) 척서리(滌署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응찬(具應燦)이고, 어머니는 김인복(金仁福)으로, 2녀 중 맏딸이다.
고향 신천군에서 사립 경신학교(儆信學校)를 졸업한 후, 1914년에 평양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에 입학하여 1917년 제8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사립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신천군에서는 3월 10일 문화면을 시작으로, 4월 9일까지 초리면, 용진면, 신천면, 노월면, 산천면, 북부면, 가련면, 용문면, 두라면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구순화가 참여한 만세운동은 3월 27일에 일어난 신천면 만세운동이었는데, 기독교인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하였다. 이들은 장날인 27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 태극기 등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거사일 오후 1시경 시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를 나누어 주고, 약 200명의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구순화도 이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받고 모인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튿날인 28일에도 약 100명이 모여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틀 동안의 만세운동으로 총 75명이 일제에 붙잡혔고, 해주지방법원, 평양복심법원,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구순화는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89년 사망하였으며, 2007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