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4월 18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회령면(會寧面)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윤선희(尹善嬉, 尹善姬)이다.
언니 윤천녀(尹天女)와 함께 개신교 계열인 회령사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회령의 보흥여학교(普興女學校)에 진학하였다. 보흥여학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18일에 근우회(槿友會) 회령지회가 출범하였는데, 이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월 22일, 보흥여학교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에게 가택 수색을 당하였다.
1930년 2월 2일경에는 청진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윤천녀와 함께 청진고등여학교(淸津高等女學校)의 광주학생운동 지지 만세시위를 모의하였다. 2월 3일부터 지봉래(池鳳來)의 집에 하숙하던 청진고등여학교 학생 황금진(黃金振)을 여러 번 방문하여 만세시위를 권하였다. 또한 그곳을 찾아온 학생들에게도 만세시위의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받았다.
이어 같은 달 8일과 10일 사이에 윤천녀의 집에서 격문 180여 장과 태극기 170여 개를 만들었다. 격문은 “전 조선적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무엇인가. 약자의 울음소리다. 음식과 의복과 자유를 획득하려는 투쟁이다. 우리들에게 눈과 귀가 있다면 노예교육 철폐하라, 검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백의인(白衣人), 형제여, 약소민족을 해방하라. 동포여 나와라, 용감하게 만세 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2월 10일에는 황금진의 주선으로 청진고등여학교 학생 김복신(金福信)의 하숙집에서 학생 16명과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서 다음날인 11일 오전 9시에서 9시 30분 사이에 신암동(新岩洞) 시장 부근에 모여 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하면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당일 밤 경찰에 만세시위 계획이 발각되었고, 경찰관 20여 명이 윤천녀와 청진고등여학교 학생들의 숙소를 수색하여 격문과 태극기를 압수하였다. 이 일로 2월 11일에 윤천녀, 함북기자동맹 집행위원 장겸신(張兼新), 신간회 청진지회 서기장 남윤구(南潤九) 등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