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5월 29일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 2월 동생인 윤선녀(尹善女: 1911~1994)와 함께 청진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시위를 준비하였으나 발각, 체포되었다. 1967년 6월 25일 사망하였다. 이명은 윤선숙(尹善淑)이다.
윤천녀는 기독교 캐나다 북장로파가 경영하는 회령의 보흥여학교(普興女學校)를 졸업하였다. 근우회(槿友會) 회령지부에서 서무부원으로 활동하다 1929년 11월 3일에 발발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인 학생 시위와 동맹휴학투쟁으로 확산되자 청진고등여학교(淸津高等女學校)에 다니는 한국인 학생의 궐기를 이끌기로 결심하였다. 청진고등여학교는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이 함께 다니는 공학이었다.
윤천녀는 동생 윤선녀와 함께 1930년 2월 3일부터 청진고등여학교 학생인 황금진(黃金振)을 만나 청진고등여학교 한국인 학생의 궐기를 권유하였고, 청진고등여학교 학생 몇 명에게도 찬동을 얻었다. 윤천녀는 그들에게 ‘광주사건에서 경찰은 한국 학생만을 검거 구속하고, 일본인과 한국인 학생을 차별하면서 불공평한 조치를 취하였기 때문에 각지의 한국인 학생이 시위에 나선 것이므로 청진고등여학교의 한국인 학생도 시위 행렬을 할 필요가 있다’고 권유하였다.
윤천녀는 1930년 2월 7일부터는 자신의 집에서 윤선녀, 황금진, 임화순, 김복신 등과 함께 시위 준비를 시작하였다. 다음날인 2월 8일부터 10일까지 “온 조선에서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무엇이냐. 약자(弱者)의 울음소리이다. 밥과 옷과 자유를 획득하려는 투쟁이다. 우리들에게 귀와 눈이 있다면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백의인(白衣人) 형제여, 약소민족을 해방하라. 동포여 나오라, 용감히 만세 만세를 부르라.”라는 내용을 담은 격문 181매와 태극기 173매를 제작하였다.
2월 10일에는 김복신의 하숙집에서 청진고등여학교 한국인 여학생 17명을 모아 다음날인 2월 11일 오전 9시~9시 30분 사이에 신암동 시장 부근에 모여 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하면서 가두시위를 감행할 준비를 마쳤다.
경찰은 사전에 청진고등여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이 세운 시위 계획을 알아 차렸다. 2월 10일 밤에 경찰은 20여 명에 이르는 청진고등여학교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여 격문과 태극기를 압수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하였다. 윤천녀는 이 사건의 배후인 것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1930년 4월 2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1930년 5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윤천녀와 선녀 자매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