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서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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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정자관을 쓴 자화상」, 「부채를 든 자화상」,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고희동 (高羲東)
일제강점기 「정자관을 쓴 자화상」, 「부채를 든 자화상」,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안중식은 조선 후기 「산수도」, 「성재수간도」, 「도원문진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1881년 중국으로 떠났던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톈진에서 1년 동안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 1902년 어진도사에 조석진과 더불어 화사로 선발되어 화명을 높였다. 이후 그의 화실인 경묵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서화미술원이 설립되자 조석진·김응원 등과 같이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18년 서화협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안중식의 화풍은 서화미술원 출신의 제자를 통해 근대 전통 화단에 영향을 미쳤다.
안중식 (安中植)
안중식은 조선 후기 「산수도」, 「성재수간도」, 「도원문진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1881년 중국으로 떠났던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톈진에서 1년 동안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 1902년 어진도사에 조석진과 더불어 화사로 선발되어 화명을 높였다. 이후 그의 화실인 경묵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서화미술원이 설립되자 조석진·김응원 등과 같이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18년 서화협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안중식의 화풍은 서화미술원 출신의 제자를 통해 근대 전통 화단에 영향을 미쳤다.
해방 이후 「농가도」, 「무창춘색도」, 「외금강삼선암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변관식 (卞寬植)
해방 이후 「농가도」, 「무창춘색도」, 「외금강삼선암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이도영은 일제강점기 「고색찬연」·「나려기완」·「석굴암 관음상」 등을 그린 서화가이자 시사만화가·삽화가·교육자이다. 1898년 전환국에 입학하여 분석학을 배웠다. 1901년 안중식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다양한 단체의 계몽운동가들과 교유하면서 시사만화, 교과서의 삽화, 신소설 삽화 등을 그렸다. 산수·인물·영모·기명절지 등 전통 회화에서도 다양한 화목의 작품을 남겼다. 이도영은 서화가로서의 지평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미술교육과 전람회 제도를 도입하고 운영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미술가이다.
이도영 (李道榮)
이도영은 일제강점기 「고색찬연」·「나려기완」·「석굴암 관음상」 등을 그린 서화가이자 시사만화가·삽화가·교육자이다. 1898년 전환국에 입학하여 분석학을 배웠다. 1901년 안중식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다양한 단체의 계몽운동가들과 교유하면서 시사만화, 교과서의 삽화, 신소설 삽화 등을 그렸다. 산수·인물·영모·기명절지 등 전통 회화에서도 다양한 화목의 작품을 남겼다. 이도영은 서화가로서의 지평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미술교육과 전람회 제도를 도입하고 운영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미술가이다.
해방 이후 「설청」을 그린 화가.
박승무 (朴勝武)
해방 이후 「설청」을 그린 화가.
해방 이후 「전가풍미」를 그린 화가. 한국화가.
최우석 (崔禹錫)
해방 이후 「전가풍미」를 그린 화가. 한국화가.
일제강점기 「유하미인」·「청조」·「춘규」 등을 그린 화가.
김권수 (金權洙)
일제강점기 「유하미인」·「청조」·「춘규」 등을 그린 화가.
일제강점기 서화협회 간사를 역임한 화가. 서양화가.
장석표 (張錫豹)
일제강점기 서화협회 간사를 역임한 화가. 서양화가.
조석진은 근대 1세대 동양화가를 배출한 미술 교육자이자, 전통시대와 근대를 잇는 가교적 역할을 한 화가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조정규에게 학문과 그림을 배웠다. 19세기 말부터 화가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서화미술회 교수, 서화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안중식과 함께 최초의 중국 유학생으로 신문물을 경험한 개화 지식인이었으며, 조선 말기와 근대 화단을 잇는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
조석진 (趙錫晋)
조석진은 근대 1세대 동양화가를 배출한 미술 교육자이자, 전통시대와 근대를 잇는 가교적 역할을 한 화가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조정규에게 학문과 그림을 배웠다. 19세기 말부터 화가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서화미술회 교수, 서화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안중식과 함께 최초의 중국 유학생으로 신문물을 경험한 개화 지식인이었으며, 조선 말기와 근대 화단을 잇는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