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이훈"
검색결과 총 8건
조선 전기에, 군사, 제주목사, 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문여량 (文汝良)
조선 전기에, 군사, 제주목사, 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승문원박사, 병조좌랑,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이성원 (李性源)
조선 후기에, 승문원박사, 병조좌랑,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홍문관부응교, 사헌부장령, 홍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언호 (李彦浩)
조선 전기에, 홍문관부응교, 사헌부장령, 홍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전기 판의주목사, 병조참판, 동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중지 (李中至)
조선전기 판의주목사, 병조참판, 동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직언은 조선 후기에, 우찬성, 판중추부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45년에 태어나 1628년에 사망하였다. 효령대군 이보의 5대손으로 1576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선조에게 국가 회복의 방책을 진언하였으며 「시무팔조」를 올렸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휘하에서 왜적을 격퇴하였다. 호조참의, 동부승지, 부총관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광해군대에 대사헌과 형조판서,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여 광해군대 8간(奸)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인조의 특지로 우찬성에 임명되었다.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며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직언 (李直彦)
이직언은 조선 후기에, 우찬성, 판중추부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45년에 태어나 1628년에 사망하였다. 효령대군 이보의 5대손으로 1576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선조에게 국가 회복의 방책을 진언하였으며 「시무팔조」를 올렸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휘하에서 왜적을 격퇴하였다. 호조참의, 동부승지, 부총관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광해군대에 대사헌과 형조판서,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여 광해군대 8간(奸)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인조의 특지로 우찬성에 임명되었다.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며 척화를 주장하였다.
조선 전기에, 대사헌, 한성부좌윤,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유청 (李惟淸)
조선 전기에, 대사헌, 한성부좌윤,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안동부 부북면(府北面) 주촌(周村)에서 1528년(중종 23)에 작성된 1장의 호적이다. 진성이씨(眞城李氏) 이훈(李壎)의 후손이 대대로 보관해왔는데, 관문서를 그것도 책자에서 낱장 한 장만을 소장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이훈의 호를 포함하여 모두 6호가 등재되어 있다. 오가 작통제(五家作統制)가 호적에 반영되기 시작하는 1675년(숙종 1) 이전의 호적이어서 17세기 초중반과 같이 크게 ‘호(戶)’라고만 써서 호를 구분했다. 당시의 신분 분류나 호적 양식과 관련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주촌호적 (周村戶籍)
안동부 부북면(府北面) 주촌(周村)에서 1528년(중종 23)에 작성된 1장의 호적이다. 진성이씨(眞城李氏) 이훈(李壎)의 후손이 대대로 보관해왔는데, 관문서를 그것도 책자에서 낱장 한 장만을 소장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이훈의 호를 포함하여 모두 6호가 등재되어 있다. 오가 작통제(五家作統制)가 호적에 반영되기 시작하는 1675년(숙종 1) 이전의 호적이어서 17세기 초중반과 같이 크게 ‘호(戶)’라고만 써서 호를 구분했다. 당시의 신분 분류나 호적 양식과 관련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안동 시은고택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이다. 예안이씨 7세손 이훈이 기묘사화를 계기로 낙향하여 1525년(중종 20)에 지은 가옥으로 사당, 대문채, 방앗간채가 멸실되고 없지만 16세기 초반의 평면 배치 및 구성, 구조 양식과 더불어 17세기를 전후한 시기 건축 양상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어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집이다. 마을 이름을 따 상리종택(上里宗宅)이라고도 부른다.
안동 시은고택 (安東 市隱古宅)
안동 시은고택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이다. 예안이씨 7세손 이훈이 기묘사화를 계기로 낙향하여 1525년(중종 20)에 지은 가옥으로 사당, 대문채, 방앗간채가 멸실되고 없지만 16세기 초반의 평면 배치 및 구성, 구조 양식과 더불어 17세기를 전후한 시기 건축 양상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어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집이다. 마을 이름을 따 상리종택(上里宗宅)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