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염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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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제는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저수지이다. 18세기 말엽 정조 대에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정비 과정에서 대대적인 개축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방축수’라는 명칭이 ‘만년제’로 바뀌었고, 수문 괴성 등이 설치되어 주변 전토에 몽리 혜택을 내려준 저수지이다. 현륭원 물길 입구에 위치하여 현륭원 아래 백성의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한 수리 시설이다. 정조 대 후반 수리 정책의 전개 과정, 현륭원 조성과 정비 사업 등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만년제 (萬年堤)
만년제는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저수지이다. 18세기 말엽 정조 대에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정비 과정에서 대대적인 개축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방축수’라는 명칭이 ‘만년제’로 바뀌었고, 수문 괴성 등이 설치되어 주변 전토에 몽리 혜택을 내려준 저수지이다. 현륭원 물길 입구에 위치하여 현륭원 아래 백성의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한 수리 시설이다. 정조 대 후반 수리 정책의 전개 과정, 현륭원 조성과 정비 사업 등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백운필은 1803년 전후 이옥이 남양도호부에 거주하면서 견문한 일상생활, 동물과 식물, 농업 관련 내용을 기록한 잡록 성격의 책이다. 이옥은 남양도호부와 한성부를 왕래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삼가현 충군에서 풀려난 이후 남양도호부에 정착하였다. 정착한 이후 1803년 전후 시기에 자신의 견문과 여러 서적의 인용을 바탕으로 일상생활, 동물과 식물, 농업 관련 내용을 백과전서 성격으로 정리하였다. 총 1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편에 자신의 경험, 민간의 전언, 여러 서적의 인용 등을 고증학적인 태도로 분석 정리하였다.
백운필 (白雲筆)
백운필은 1803년 전후 이옥이 남양도호부에 거주하면서 견문한 일상생활, 동물과 식물, 농업 관련 내용을 기록한 잡록 성격의 책이다. 이옥은 남양도호부와 한성부를 왕래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삼가현 충군에서 풀려난 이후 남양도호부에 정착하였다. 정착한 이후 1803년 전후 시기에 자신의 견문과 여러 서적의 인용을 바탕으로 일상생활, 동물과 식물, 농업 관련 내용을 백과전서 성격으로 정리하였다. 총 1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편에 자신의 경험, 민간의 전언, 여러 서적의 인용 등을 고증학적인 태도로 분석 정리하였다.
벽골제는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 4세기에 백제에서 처음 축조한 이후 신라, 고려, 조선 태종 대 개축하여 수리에 활용한 저수지이다. 저수지로 파악하는 견해와 방조제로 간주하는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현재 원래의 제방이 훼손되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이 밝혀지고 있다. 벽골제는 오랜 기간 수리 시설로 활용되었고,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 토목 기술의 역사적 특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농업사 연구, 토목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벽골제 (碧骨堤)
벽골제는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 4세기에 백제에서 처음 축조한 이후 신라, 고려, 조선 태종 대 개축하여 수리에 활용한 저수지이다. 저수지로 파악하는 견해와 방조제로 간주하는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현재 원래의 제방이 훼손되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이 밝혀지고 있다. 벽골제는 오랜 기간 수리 시설로 활용되었고, 제방 축조와 수문 구조, 도수로 등 토목 기술의 역사적 특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농업사 연구, 토목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한민명전의는 18세기말 박지원이 면천군수를 지낼 때 작성한 것으로 토지 소유의 제한을 제한하자는 한전론을 담고 있는 글이다. 그는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설정하고 현재의 소유 상황을 인정한 상태에서 장차 그 이상의 소유를 금지하여 점차 균등한 토지 소유를 성립시키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한민명전의는 18세기말 박지원이 면천군수를 지낼 때 작성한 것으로 토지 소유의 제한을 제한하자는 한전론을 담고 있는 글이다. 그는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설정하고 현재의 소유 상황을 인정한 상태에서 장차 그 이상의 소유를 금지하여 점차 균등한 토지 소유를 성립시키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광작(廣作)은 조선 후기 경작 토지의 규모를 확대하여 농업 생산을 도모하던 일이다. 지주, 자작농뿐 아니라 소작농도 광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광작으로 농민 1인당 경작 능력이 크게 늘어나 농업 변동을 유발하였다. 광작이 지역별, 계층별 특수성을 지니고 있어 생산성 향상의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입장도 제시되었다.
광작 (廣作)
광작(廣作)은 조선 후기 경작 토지의 규모를 확대하여 농업 생산을 도모하던 일이다. 지주, 자작농뿐 아니라 소작농도 광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광작으로 농민 1인당 경작 능력이 크게 늘어나 농업 변동을 유발하였다. 광작이 지역별, 계층별 특수성을 지니고 있어 생산성 향상의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입장도 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