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사건(椵島事件)은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다.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에 진을 친 이후 조선 · 명 · 후금 사이는 다음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모문룡이 조선과의 군사 공조를 꾀한 시기, 둘째, 유흥치의 정변 등 동강진의 내부적 권력 갈등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불안정해진 시기, 셋째, 부총병 심세괴가 동강진을 이끈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에는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가도를 점령하면서 동강진이 소멸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3월 후금이 명의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을 점령한 뒤, 해개도(海盖道)에 속하였던 해주위(海州衛) · 개주위(盖州衛) · 복주위(復州衛) · 의주위(義州衛) 등 남사위(南四衛)도 무너졌다. 후금은 일부 군대를 파견하여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의주부(義州府)와 마주 보고 있던 명의 진강아문(鎭江衙門)마저 함락시켰고, 이로써 조선과 명의 교통로가 단절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에도 큰 여파를 미쳤다. 남사위와 진강아문, 관전보(寬奠堡) 등의 한인들이 후금의 점령에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진강아문의 진대(陳大)라는 인물이 누르하치가 관전의 참장(參將)으로 임명한 진요도(陳堯道)를 살해하고 3천 명의 한인을 모아 자위 조직을 구축하였다.
명 조정에서는 이 소식에 고무되어 지원책을 논의하였지만 요동의 제 아문은 하서(河西)의 광녕(廣寧)으로 이동한 상태였고, 산동의 등주(登州)를 통한 해로상의 지원 역시 즉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남사위와 진강아문, 관전보의 한인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으로 도주하였는데, 명에서는 이들을 조선에 두었다가 사태가 안정되면 귀국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에는 참장 한종공(韓宗功) 등 명나라 장수들도 적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1621년 5월 누르하치는 이영방(李永芳)과 우르구다이 등을 파견하여 의주부의 옥강(玉江) · 수구(守口) 등지로 진입하여 한인들을 색출, 도륙, 압송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심각한 위협을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남사위 등의 요민들이 대거 조선에 입국한 시점에 명은 조선의 전략적 가치를 인지하였으며, 특히 조선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파견하였던 유홍훈(劉鴻訓) 등이 조선의 배를 타고 안주(安州)로부터 해로를 통해 등주로 귀국한 것을 계기로 산동에 등래순무(登萊巡撫)를 신설하였다.
이는 해로를 통해서 후금의 활동을 저지하는 해방(海防)의 개념과 동시에 운량로(運糧路)를 확보하고, 아울러 요동 대신 산동을 통해서 전략적 가치가 높은 조선과의 연계를 유지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조처였다.
이 무렵 명은 후금이 광녕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방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명의 요동경략(遼東經略) 웅정필(熊廷弼)은 조선과의 연합이 중요하며 또 현실성도 높지만 이를 주관할 만한 인물이 없다면서 요동남로감군도(遼東南路監軍道) 양지원(梁之垣)을 파견하여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가게 할 계획을 세웠다.
비슷한 시기에 요동순무 왕화정(王化貞)은 도사(都司) 모문룡(毛文龍)을 파견하여 220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진강아문을 점령하게 하였다. 모문룡은 조선의 미곶(彌串)을 통해 진입하여 진강아문 일대를 정탐하였고, 현지의 생원 왕일녕(王一寧) 등과 모의한 뒤 휘하의 천총 진충(陳忠)을 파견하여 진강중군 진양책(陳良策)의 내응을 얻어 야습을 감행하였다.
모문룡 일행은 누르하치가 임명한 동양진(佟養眞) 부자를 사로잡고 적과 내통했던 그의 부하 60여 명을 제거한 뒤, 인근의 병사들을 규합하여 위세를 떨쳤다.
이 사건을 진강의 기첩(奇捷)이라고 하며, 이 소식을 접한 명 조정에서는 모문룡을 부총병(副總兵)으로 임명하고 진책 등 앞장선 인물들은 수비(守備)로 임명하였으며 진양책 등도 포상하였다. 아울러 천계제는 조선 국왕 광해군에게 칙서를 내려 심하전역(深河戰役)의 전사자들에게 휼전(恤典) 명목으로 지급할 은을 내주면서 향후 감군 양지원에게 적극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모문룡의 진강 탈취는 조선과 명의 교통로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향후 후금의 공격을 초래할 가능성도 높아졌으므로 조선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누르하치는 즉시 아민(阿敏)을 파견하여 진강을 탈환하였고, 모문룡은 대규모의 한인들과 함께 조선의 경내로 도주하였다. 이때부터 모문룡은 조선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협력을 요청하였으며, 현지의 관원들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명 조정의 직접적인 지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그의 역량이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충분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은 1621년 12월, 모문룡을 잡기 위해 출동한 후금의 아민이 조선에 재차 들어온 ‘임반의 변’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노출되었다.
후금의 군대는 500~600명에 달하는 한인들을 현장에서 도륙하고 그보다 많은 포로를 확보하였다. 모문룡은 급히 병화를 피해 조선의 내지로 진입하여 청천강 인근의 안주까지 들어와 의탁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은 모문룡에게 해도(海島)로 들어갈 것을 종용하여 관철시켰다. 이는 모문룡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하였지만 그를 잡기 위해 후금 군대가 재차 거사할 것을 우려한 것이기도 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6월 명 조정은 부총병 모문룡을 총병관으로 승진시키고, 평료(平遼)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평료총병관 모문룡에게는 요동과 산동에 인접한 지역의 섬들을 통제하고 아울러 조선과의 협력 체제를 구축하여 후금을 견제하게 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모문룡이 가도를 거점으로 삼게 되면서 그를 구심점으로 하는 동강진은 예전의 진강아문을 대신하여 등래순무와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조선은 동강진을 통해서 산동으로 진입하는 해로를 사용하여 명과 교통하였으며, 다시 산동과 천진을 거쳐 북경을 드나들었다. 동강진이 조명 관계의 매개로 작용하게 되자 평료총병 모문룡의 권위는 신장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에 막대한 부담을 초래하였다. 광해군은 시종 그에 대한 불신감을 감추지 못하였고, 반정(反正)을 통해 집권한 인조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조는 반정 직후 모문룡과의 전심 협력을 누차 다짐하였다. 그는 이 점을 광해군과의 차별성으로 내세웠으며,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과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로 하여금 그의 지시에 따르도록 지시하였다. 그렇다고 인조 정권이 광해군 대와 달리 모문룡을 깊이 신뢰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모문룡이 내실을 기하기보다는 허장성세를 늘어놓는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반정 직후 인조 정권이 그에게 적극 협조한 사실은 명 황제의 국왕 책봉을 성사시키는 데 있어 그의 입김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 주는 것일 뿐이었다. 실제로 1624년(인조 2) 이괄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문룡은 전혀 협조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내실 있는 행동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1626년(인조 4)에는 후금과의 사신 교류가 여러 차례 목격되면서, 조선 조정의 불신이 더욱 깊어졌다.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에도 모문룡은 후금군과의 전투를 회피할 뿐이었고, 조선과 후금이 화친하게 되자 도리어 청천강 이북의 조선인에 대한 약탈을 거듭 자행함으로써 공분을 자아냈다. 이렇듯 정묘호란을 전후한 시기 조선과 동강진은 후금을 견제한다는 목표하의 군사 공조를 추구하였으나, 실상은 상호 불신으로 가득하였고 이는 정묘호란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정묘호란 이후 모문룡은 독자적인 세력으로 탈피하려는 행각을 벌여 조선과 명 모두에게 부담을 안겨 주었다. 1629년(인조 7) 6월, 독수(督師) 원숭환(袁崇煥)에게 소환되어 쌍도(雙島)에서 주살되었다.
죄목은 전공의 과장, 도를 넘은 군량 요청, 영원성 전투(1626) 당시 협조하지 않은 것 등 군사적 실효성에 대한 의문, 조선에 대한 과도한 수탈 등이었다. 이러한 죄목은 동강진이 조선과 명의 연결고리로 존재하면서도 현실적인 군사 공조를 오히려 저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모문룡의 사후 동강진의 경영은 중군(中軍)인 부총병 진계성(陳繼盛)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진계성 외에도 모승조(毛承祚), 서부주(徐敷奏), 유흥조(劉興祚) 등 총 4인이 병력을 나누어 관장하였고, 실질적인 영향력은 유흥조가 장악하고 있었다.
유흥조가 후금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뒤로는 그의 동생인 유흥치(劉興治) 등이 그를 이었다. 1630년(인조 8) 4월, 유흥치가 진계성을 살해하고 동강진의 실권을 거머쥐게 되자, 조선에서는 이 사건을 정변으로 규정하고 정벌을 천명하였다.
조선은 이를 통해 세 가지를 노렸다. 하나는 조선에 대한 약탈을 서슴지 않는 동강진 자체의 위협 제거였고, 다른 하나는 후금에 대한 실력 과시였으며, 마지막은 그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명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후금과 화친하여야 했던 ‘과오’를 씻으려는 것이었다. 조선군은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육군을,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수군을 거느리고 가도를 비롯한 인근의 섬들을 위협하면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도 이견이 많았는데, 동강진이 공식적으로 명의 군진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유흥치가 주장을 죽이고 권력을 탈취한 반장(叛將)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별다른 전투 없이 조선군이 해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이는 유흥치가 섬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명에서 그의 행동을 묵인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은 금주(錦州) 참장(參將) 황룡(黃龍)으로 하여금 동강진을 관할하게 했지만, 가도 인근의 섬까지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고 유흥치와 그의 형제들은 자체적으로 후금과 교섭을 벌였다.
1631년(인조 9) 3월, 후금과의 교섭에 불만을 품은 장도(張燾)와 심세괴(沈世魁)가 유흥치 형제들을 살해하였다. 결국 동강진을 관장하던 황룡이 직접 가도에 와서 머물게 되었으나, 재물에 대한 탐욕을 부리다가 심세괴에 의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병변(兵變) 소식에 놀란 조선 조정은 즉각 물적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하였고, 결국 심세괴는 관련자 몇 명을 처벌하고 황룡에게 권한을 다시 이양하였다.
이 무렵 동강진은 물론, 조선과 명 · 청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산동 지역에서 이른바 ‘오교병변(吳橋兵變)’이 일어난 것이다.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군대를 이끌고 산동으로 갔다가 현지의 군사들과 충돌하고, 다시 반란을 일으켜 등주와 내주를 장악한 사건이다. 이들은 한동안 산동성에 거점을 마련하였으나 곧 축출되고 1633년(인조 11) 후금에 투항하게 된다.
1632년(인조 10) 가도에 주둔하던 황룡은 이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여순(旅順)으로 가서 상가희(尙可喜) 등과 진압 작전을 벌였는데, 이듬해 후금군을 이끌고 온 공유덕과 전투를 벌이다 여순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1634년(인조 12)에는 상가희마저 공유덕의 권유로 후금에 투항하게 되자, 동강진은 후금에 대한 견제력을 잃었으며 심세괴가 지키고 있던 가도 인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거점을 상실하게 되었다.
황룡이 전사한 뒤, 가도 일대로 축소된 동강진은 부총병 심세괴가 관장하였다. 동강진의 영향력은 몹시 약화되었지만, 이 시기에 조선과의 관계는 회복되는 추세였다. 후금 역시 동강진의 세력 대부분을 흡수한 상황에서 가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심세괴는 누차 후금에 대한 강경책을 개진하여 조선을 난처하게 했으나 실행에 옮길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시기에 가도는 사실상 조선에 기생하다시피 하였고, 후금의 배후를 공략한다는 취지는 유지할 수 없었다.
1637년(인조 15) 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조선이 청에 신속(臣屬)하게 되자 가도는 위험에 빠졌다. 그해 4월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마푸타가 거느린 청군이 연합하여 가도를 공격하였다. 조선과 청의 연합군은 격전 끝에 가도를 함락하고 심세괴를 붙잡아 주살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명의 관계는 의례적인 측면은 물론 현실적인 접점에 있어서도 단절되었다.
가도는 요동아문의 축소 이후, 조선과 명의 중개지이자 후금의 배후를 견제하는 전략적 역할을 했던 동강진의 주요 도서였고, 따라서 가도의 함락은 조선과 명의 단절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가도사건은 조선과 명, 후금의 복잡한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새로이 왕성해지던 후금의 위협으로 인해 변질된 조명 관계, 새로 수립되는 조청 관계의 일단면을 살펴볼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의례(儀禮)의 이면에서 전개된 현실적인 외교를 살펴볼 수 있다.
모문룡에 의한 동강진의 설치는 후금이 요동을 점령하여 요동아문이 후퇴하면서 새로이 조선과의 중개를 담당하였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군사 공조의 성격이 강하였다.
가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일련의 사건에서 조선과 명은 협력보다는 갈등을 빚었는데, 이는 후금의 세력 및 영향력 확대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이 명과의 의례적 관계를 단절하였다면, 불과 2개월 뒤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청나라의 군사들과 함께 가도를 함락하게 됨으로써 현실적인 관계에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