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노성은 1624년(인조 2) 증광(增廣)에서 생원시(生員試) 3등으로 입격하여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되었다. 1629년(인조 7) 7월, 성균관의 칠석상순윤차단자(七夕上旬輪次單子)로 인하여 직부회시(直赴會試)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1631년(인조 9) 1월, 인조가 성균관의 학생들에게 시취(試取)하였을 때 3등을 차지하였으나 수석한 이창립(李昌立)이 실격하여 거수 생원(居首生員)으로서 직부전시(直赴殿試)의 기회를 받았다. 같은 해 별시 문과(別試文科)에서 병과 10위로 급제하였다. 1631년(인조 9) 11월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가 되었고, 동년 12월에는 승문원(承文院)의 신래(新來)로 간택되었다. 같은 달 예조(禮曹)에서 뽑아서 아뢴 30세 이하의 전경 문신(專經文臣)에 들었다.
1634년(인조 12)부터 1636년(인조 14)까지 예문관 검열(檢閱), 승정원 주서(注書), 시강원 겸설서(兼說書), 예문관 봉교(奉敎), 사간원 정언(正言), 병조좌랑(兵曹佐郎)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호종록(扈從錄)에 기록되었다. 이후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주로 윤방(尹昉)이나 김류(金瑬) 등 병자호란 관련자들의 처벌을 요청하였다. 1639년(인조 17), 1640년(인조 18)에는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파견되었고, 돌아와서는 육조의 낭청과 삼사의 관원을 지냈다.
1641년(인조 19) 3월에는 특명으로 문학(文學)에 제수되었으나, 남이웅(南以雄)과의 갈등으로 좌천되었다. 그해 4월 청나라의 심양(瀋陽)으로의 파견이 결정되어 고향인 원주(原州)에 갔다가 외할아버지 김상용(金尙容)의 묘를 찾아가려고 하였는데, 어머니 김씨가 아들이 정축년 이후에 출사한 점과 심양에 가게 된 점을 들어 이를 막아섰다. 같은 해 5월에 심양으로 파견되어 10월에 귀국하였다.
1642년(인조 20) 11월에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어 외직으로 나갔고, 이후에 주로 삼사의 관원을 지냈다. 1645년(인조 23)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세자 책봉을 위한 책례도감(冊禮都監)의 도청(都廳)을 지냈다. 1646년(인조 24) 3월, 강빈(姜嬪)을 구하기 위해 대간직을 사직하였다가 파직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재기용되었다.
1647년(인조 25) 11월 궁궐 영건을 담당한 수리소(修理所)의 도청으로 임무를 수행하여 당상(堂上)으로 승진하고, 12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듬해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650년(효종 즉위) 11월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승지직을 지냈으며 호조참의, 이조참의, 예조참의를 두루 거쳤다. 1654년(효종 5)에는 좌승지(左承旨)와 우승지(右承旨)를 번갈아 지내고 그해 8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7월 파견되었다.
1655년(효종 6) 12월 별전(別殿)의 축조 문제로 인해 체차되었다가 파직되고, 1년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1656년(효종 7) 8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서용되었다가 병조참의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7년(효종 8) 3월에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이듬해 6월 삼수(三水)에 귀양 가 있던 의관 정지문(鄭之問)이 유배지를 이탈하여 병영을 거쳐 감영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대죄하였고 파직되었다. 1658년(효종 9) 12월에는 안주영위사(安州迎慰使)로서 청의 칙사를 접대하였고, 이듬해인 1659년(효종 10) 2월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어 부총관(副摠管)을 겸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1660년(현종 1) 1월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임명되었다. 그해 8월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의 위판(位版) 절도 및 파손 사건에서 비롯된 옥사로 인해 파직되었다. 1661년(현종 2) 8월에 재기용되어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663년(현종 4) 6월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해 7월 도승지(都承旨)로 발탁되었다. 그해 10월 예조참판으로 재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667년(현종 8)까지 병조참판, 호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