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우는 29세가 되던 1601년(선조 34) 식년시에 입격하고, 2년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급제 직후부터 승정원의 가주서(假注書)로 활동하였고, 1605년(선조 38)에는 주서로 임명되었다. 1606년(선조 39)에는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공조좌랑, 병조좌랑을 지냈다. 1607년(선조 40) 11월에는 정사 유인길(柳寅吉), 부사 최렴(崔濂)과 함께 사은사 행의 서장관으로 파견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1611년(광해군 3)까지는 삼사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12년(광해군 4) 1월에는 암행어사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어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외직에 나갔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7명의 신하들이 죄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아버지인 서성(徐渻)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성이 유배되면서 서경우 역시 은거하며 지냈다. 인조반정 이후에 소환되었으나 그해 겨울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듬해인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국왕 인조 일행이 공주까지 내려갈 때 호종하였으며, 환도 이후에는 통정대부로 가자되었다.
1625년(인조 3) 모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예조참의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3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후 좌부승지(左副承旨), 우승지(右承旨)를 지냈다. 11월에는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1626년(인조 4) 호조참의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대사간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발하여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게 되자 호종하였다. 1629년(인조 7) 1월 대사간에 다시 임용되었고, 좌부승지와 우부승지를 지냈다.
1634년(인조 12) 3월 좌승지가 되었는데, 인조의 친부(親父)인 정원군(定遠君)의 원종(元宗) 추숭(追崇)에 성공한 것에 기여하여 반숙마(半熟馬, 조금 길들이 말) 1필을 하사받았다. 이듬해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형조참판과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5월 대사헌이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경기감사 겸 개성 · 강화부유수(京畿監司兼開城江華府留守)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으나 남한산성에 미처 들어가지 못하여 경기감사에서 체차되었다. 1637년(인조 15)에는 대사간과 성균관 대사성을 번갈아 지내고, 같은 해 11월에 좌승지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1월 도승지가 되었다. 1638년(인조 16) 대사헌과 대사성, 도승지를 지낸 뒤 1639년(인조 17)에는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외직에 나갔다.
1641년(인조 19)에는 대사헌, 도승지를 번갈아 지냈다. 1642년(인조 20) 최명길(崔鳴吉), 이현영(李顯英), 이식(李植), 이경증(李景曾), 이후원(李厚源)과 함께 중국 심양에 가서 청나라의 조사를 받았다. 1643년(인조 21) 4월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성절사(聖節使)로 심양에 파견되었다. 1644년(인조 22) 9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1645년(인조 23) 2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3월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