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명(金重明)은 1614년(광해군 6)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회(而晦)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호조참판을 지낸 충간공(忠簡公) 김권(金權), 할아버지는 군수 김흥상(金興祥)이다. 아버지는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 김전(金㙉),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신상렴(申尙廉)의 딸이다. 부인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증 참판 조계남(趙繼男)의 딸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김석여(金錫如), 차남은 김석홍(金錫弘), 딸은 홍연(洪演)에게 시집갔다. 두 명의 서녀(庶女)도 있었는데, 첫째는 현감 조이량(曺以樑), 둘째는 임제원(任悌元)과 혼인하였다.
김중명은 아버지 김전의 죽음과 송시열(宋時烈)의 권유를 계기로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빙고별제(氷庫別提)였던 아버지 김전(金㙉)은 춘천(春川)에서부터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청병(淸兵)과 조우하여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훗날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김중명은 아버지의 시신을 메고 양주(楊州)의 금촌(金村)에 장사 지내고 낮과 밤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복수를 생각하였는데, 송시열이 이를 보고서 무예를 업으로 삼기를 권하였다. 1645년(인조 23)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효종대에는 장재(將材)를 갖춘 인물을 구하는 국왕의 요구에 따라 송시열이 김중명 천거하였는데, 효종이 그를 불러들여 용력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김중명은 두 개의 모래주머니를 각각 좌우의 겨드랑이에 끼고 또 하나의 모래주머니를 등에 멘 채 궐 밖에서부터 어전까지 걸어와 효종을 놀라게 하였다. 이로써 김중명은 북벌(北伐)을 꿈꾸는 효종의 눈에 들어 무관으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도총도사(都摠都事), 도총경력(都摠經歷)을 지냈고 1654년(효종 5) 죽산부사(竹山府使)를 거쳐, 1655년(효종 6)에는 갑산부사(甲山府使)에 임명되었다. 갑산부사로 재임할 때 형장을 남용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의금부(義禁府)로 나수(拿囚)되었으나 1658년(효종 9)에 직첩(職牒)을 환급받았고, 같은 해 11월 훈련원(訓鍊院) 첨정(僉正)으로 재기용되었다. 이후 장흥부사(長興府使)에 임명되었는데, 1660년(현종 1) 4월 해유(解由)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임명장을 돌려받았다.
1661년(현종 2) 6월에는 훈련원 부정(副正)이 되었으나 개차(改差)되었다. 1662년(현종 3) 5월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에 제수되었다가 6월에는 훈련원 부정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익산영장(益山營將)으로 임명되었고,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667년(현종 8) 11월 겸사복장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8월에는 현종의 온양온천 행행 시 겸사복장으로서 호종하였다. 이후 해미현감(海美縣監)을 거쳐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임명되었는데, 1670년(현종 11) 윤2월 입직을 앞두고 모화관(慕華館)에서 습진(習陣)하다가 말에서 낙상하여 왼쪽 팔을 다쳤다.
1671년(현종 12) 영흥부사(永興府使)로 재임할 때 노비 송남(松男)이 주인을 죽이는 강상죄가 발생하였는데, 영흥부는 선조의 능침이 있다는 이유로 강호(降號)를 면하는 대신 부사 김중명이 파직되었다. 1672년(현종 13) 12월 우림위장에 제수되었고, 1673년(현종 14) 9월에는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임명되었으나 해미현감으로 재임할 때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차되었다.
1673년(현종 14) 11월에 다시 겸사복장을 지냈고, 곧이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군 충정에 대한 계본(啓本)에 ‘근계(謹啓)’라는 문구를 빠트렸다는 것과 춘하등(春夏等) 포폄(褒貶)에서 소속 변장에게 하(下)를 주지 않았다는 것 등으로 계속 추고되었으며, 1678년(숙종 4) 7월 비축곡을 모곡으로 삼아 군수(軍需)의 재원을 마련해 온 관행을 게을리하여 수영의 재정을 고갈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80년(숙종 6) 10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가 1682년(숙종 8) 9월 개만(箇滿)으로 임기를 마쳤다. 1682년(숙종 8) 8월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가 청풍의 백치(白峙)에서 지내다가 1685년(숙종 11)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