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적은 학업과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19세가 되던 1612년(광해군 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고, 그 여파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져서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당시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상소를 올려 영창대군에 대한 처리가 잘못된 점을 밝혔다가 사죄(死罪)로 논해지자, 형인 강대수가 정온을 옹호하여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 강익문도 유배되었으므로 강대적 역시 출사하지 않았고, 고향인 합천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여러 차례에 걸쳐 세마(洗馬)‧참봉(參奉)‧찰방(察訪) 등으로 기용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1636~1637) 때 의병을 일으켰다.
1637년(인조 15)에는 충(忠)과 효(孝)를 겸비하였다고 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받았다. 1647년(인조 25) 1월 선공감(繕工監) 직장(直長)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장악원(掌樂院) 직장 조지맹(趙志孟)과 상환(相換)하여 자리를 옮기게 되었으나 아버지 강익문의 병환이 심하여 낙향하였다. 1673년(현종 14) 9월, 80세의 나이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강대적은 강직한 학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늙어서도 오히려 새롭다는 ‘자신잠(自新箴)’을 짓고 이를 학업의 기조로 삼았다. 저술로는 문집 『구주집(鷗洲集)』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공로를 인정받아 동부승지(同副承旨)의 관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