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하는 아버지 김동준에게 학업을 익혔으며, 효행과 우애, 벗들과의 교우로 이름이 났다. 그는 남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남들로부터 비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1627년(인조 5) 1월,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된 김장생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김장생의 격문을 가지고 의병(義兵)을 소집하고 의량(義糧)을 모았으며, 마침 분조(分朝)를 이끌고 남하하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김장생과 함께 공주(公州)로 가서 호종(扈從)하였다.
김성하는 김장생이 맡기는 일마다 잘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김장생의 천거를 받아 출사할 기회를 받았다. 그러나 김성하는 이를 사양하고 낙향하였으며, 자신의 공로를 주변에 자랑하거나 알리지 않아 칭찬을 받았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기 위해 숙부 김동달(金東達)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갔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청과의 화친이 성사된 뒤였으므로 그대로 귀향하였다. 호종한 공로로 절충장군(折衝將軍)의 계(階)를 받고 부호군(副護軍)의 군직을 받았다.
1676년(숙종 2) 고향에서 향년 82세에 사망하였다. 김성하는 역서와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