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 승도의 난은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경에서 일으킨 저항이다.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 승려들의 저항을 시작으로 1217년(고종 4)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대비해 종군(從軍)하던 승려들이 저항을 일으켰다. 이들 저항의 이면에는 무신정변 이전까지 고려 불교계를 이끌었던 교종(敎宗) 교단이 무신정변으로 인하여 그들을 후원했던 왕실과 문벌 귀족들의 권력이 약화하고, 선종(禪宗) 교단으로의 교체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고려의 불교는 왕실 및 문벌 귀족들의 보호와 지원 밑에서 융성하였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이들이 무력해지고 무신 집권자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무신정권에 반발해 승려들이 자주 저항을 일으켰다. 그중에서 국도 개경(開京)에서 일어난 저항이 가장 많았고 그 규모도 컸다. 이러한 저항은 이의방(李義方) 집권기부터 최충헌(崔忠獻) 집권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저항은 기존의 문벌 귀족 체제와 연결된 교종(敎宗) 세력이 주축이 된 것으로 다분히 정치적 · 복고적 성향을 띤 것이었다. 특히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불교계에 대한 개편을 시도하여 선종(禪宗) 중심의 교단 체제를 구축하려 하였기 때문에 교종 계통의 반발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00여 명이 당시 횡포가 심하던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고 개성 북문(北門)을 침범하였다. 이에 이의방은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승려들을 쳐서 수십 명을 죽이고 나머지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귀법사를 비롯해 중광사(重光寺) · 홍호사(弘護寺) · 홍화사(弘化寺) 등의 승려 2,000여 명이 개성 동문(東門)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성문이 닫혀 있자 성 밖의 인가에 불을 질러 숭인문(崇仁門)을 불태운 뒤 성안으로 들어가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하였다. 이의방은 부병(府兵)을 징집해 승려 100여 명을 죽이고 성문을 지키게 하여 승려들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또한 부병을 중광사 · 홍호사 · 귀법사 · 용흥사(龍興寺) · 묘지사(妙智寺) · 복흥사(福興寺)에 보내 절에 불을 지르고 재화(財貨)와 기명(器皿)을 빼앗았다. 돌아오던 도중 다시 승려들의 요격을 받아 부병 중 죽은 자가 많았지만, 귀법사 등의 승려들이 이의방을 제거하려는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정균(鄭筠)의 계책에 의해 승려 종참(宗旵) 등이 선의문(宣義門)에서 이의방을 죽였는데, 이는 무신정권 초기의 사원 세력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1178년(명종 8) 흥왕사(興王寺)의 승려가 저항을 꾀하다가, 산원(散員) 고자장(高子章)과 함께 잡혀 살해된 일이 있었다.
여기서 중광사 · 홍호사 · 흥왕사는 왕실의 원찰(願刹)이었고, 나머지 사원들도 왕실이나 문벌 귀족들과 연결되었다. 이런 점은 무신정변 이후 무신정권과 사원 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217년(고종 4)에는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대비해 종군하던 승려들이 잦은 공역(工役)에 시달린 데 원한을 품고 저항을 일으켰다. 즉, 1216년(고종 3) 몽골에 쫓긴 거란유종이 고려에 침입하자 승군(僧軍)도 참전했는데, 그 가운데 개경의 흥왕사 · 홍원사(弘圓寺) · 경복사(景福寺) · 왕륜사(王輪寺)와 시흥의 안양사(安養寺), 광주(廣州)의 수리사(修理寺)의 승군이 저항을 일으켰다. 이들은 최충헌을 죽이려고 거짓으로 적에게 쫓기는 것처럼 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최충헌에게 아부하면서 자주 요역(徭役)을 일으켜 사원을 피폐하게 한 낭장(郎將) 김덕명(金德明)의 집을 부수고, 다음에 최충헌의 집을 치기로 하였다. 이때 최충헌이 가병(家兵)을 보내어 승군을 공격하게 하였고, 이때 살해된 승려는 무려 800여 명이나 되었다.
개경 승려의 저항은 그들을 옹호했던 왕실과 문벌 귀족 중심의 구지배 체제를 복구하려고 한 것이었다. 무신정변 이전까지는 왕실과 문벌 귀족들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교종이 고려의 불교계를 주도하였는데, 무신정변은 이러한 상황을 뒤집어 놓았다. 교종 교단은 그들의 강력한 세력 기반을 상실하였다. 특히 최충헌은 ‘ 봉사십조(封事十條)’를 통해서 사원을 통제하려 하였고, ‘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통해서는 사원의 정치 · 경제적 기반을 장악하여 정권 유지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에 교종 계통의 승려 세력들은 무신정권에 끊임없이 저항하였고, 무신정권 성립으로부터 최충헌 정권 초기까지 승려들의 저항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