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淸州) 출신의 호족으로 본주의 영군장군(領軍將軍)이 되었다. 918년(태조 1)에 부장(副將) 연익(連翼) · 흥현(興鉉)과 함께 개경에 가서 왕건에게 충성하는 청주인 김근겸(金勤謙) · 관준(寬駿) · 김언규(金言規) 등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도리어 김근겸 등에 의해 이심(異心)이 있는 자라는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왕건은 견금 등을 후대하면서 돌아가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왕건의 처사에 감복하여 결국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제어하기가 어려운 실정을 설명하고 관군의 파견을 청하였으며, 왕건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왕건은 건의에 따라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 ·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군사 1,500명으로 진주(鎭州: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에 주둔하게 하여 변란에 대비하게 했다.
또 마군장군 능식(能植)을 보내어 도안군(道安郡: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을 진무하자 청주세력이 쉽게 반역하지 못했으며, 뒤에 진선(陳瑄)과 그 아우 선장(宣長)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